ADVERTISEMENT
오피니언 이정동의 축적의 시간

창의적 천재보다 집요한 개미들이 세상 바꾼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4면

혁신기술의 진화 원리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평범한 가정집에는 몇 가지 종류의 물건이 있을까? 칫솔부터, 세탁기, 냉장고와 그 안의 냉동만두까지 목록을 한번 작성해보면 그 다양함에 깜짝 놀란다. 아마존에서 팔리고 있는 상품만 보더라도 7500만 종이고, 재고관리를 위한 바코드 숫자로는 3억5000만 가지에 달한다. 정말 그렇게 다양할까 싶지만, 우리나라 장인의 호미까지 팔리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이해가 가기도 한다. 게다가 아마존에서는 인공위성이나 첨단 전자현미경 등은 취급하지 않으니 이것들까지 포함하면 인간이 만든 물건의 수를 헤아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원시 부족사회의 시대로 되돌아가 인공적 물건들의 종류를 헤아려보면 돌도끼나 동물뼈 바늘 등 자질구레한 것까지 모두 합쳐도 1000여 종 남짓일 것으로 추산된다.

기술도 생물처럼 끝없이 진화해 #변이·선택·전승의 부단한 되풀이 #일본 휴대폰·가전이 무너진 이유 #개방·도전적 생태계 조성 없어서

돌칼부터 스마트폰까지 진화한 역사

생물학자들은 지구상에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까지 포함해서 약 1500만 종 이상의 생물종이 있을 것으로 본다. 비교가 적절하지 않을 수 있지만, 자연계의 생물보다 인간이 만든 물건이 훨씬 다양한 것만은 분명하다. 유형적인 물건뿐 아니라 무형적인 특허나 비즈니스 모델 등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것을 통칭해서 기술이라고 한다면, 문명의 발전이란 바로 기술의 종류가 다양하게 분화하면서 발전한 결과로 볼 수 있다. 기술진화는 인간의 느린 생물학적 진화를 우회하는 또 다른 진화경로다.

돌칼로부터 최신의 접는 스마트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술이 생겨난 것은 전형적인 진화과정의 결과다. 단순하기 짝이 없는 미생물이 오늘날 다양한 생물종이 된 바로 그 과정이다. 생물이든 기술이든 진화의 핵심 요소는 딱 세 가지다. 외부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생기는 다양한 변이(variation), 그 가운데 좋은 것이 살아남는 선택(selection), 그리고 우수한 변이의 속성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전승(retention)이다.

이정동의 축적의 시간

이정동의 축적의 시간

혁신적 제품과 비즈니스 모델 등 혁신기술을 갈구하는 기업의 입장에서 변이-선택-전승의 진화논리는 색다른 시각을 제공한다. 가구 산업에서 혁신적인 모델로 성공한 이케아의 역사가 좋은 사례다.

이케아는 1943년 스웨덴 시골 마을의 작은 가구판매점으로 시작했다. 도시에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물건을 팔기 위해 카탈로그를 만들어 우편주문을 받기 시작했다. 큰 매장을 가지고 있던 대형가구점들이 반발하자, 변두리 지역에 샘플 전시용 창고를 짓고 고객들이 구경하고 구매할 수 있도록 했다. 테이블 다리를 뗄 수 있는 제품으로 진화한 것은 배송비를 절감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외부 디자이너와의 협력이 여의치 않자 해결책으로 직접 디자이너를 고용하기 시작했고, 결국 이케아의 자체 디자인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목재 등 재료공급에 문제가 생겼을 때 멀리 폴란드에서 낮은 가격으로 공급해줄 수 있는 위탁생산자를 어렵게 찾아냈고, 놀라운 가격할인이라는 모델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수도 스톡홀롬에 처음 매장을 열고 나서 너무 많은 고객이 몰렸을 때는 또 다른 궁여지책으로 고객이 직접 창고로 가서 제품을 가져오게 하는 아이디어를 더했다. 이런 진화과정을 거쳐 오늘날 이케아의 혁신제품과 비즈니스 모델이 완성돼 갔고, 연 매출 50조가 넘는 글로벌 기업이 탄생했다.

이케아 모델이 주는 두 가지 교훈

이케아 모델의 진화역사가 기업인에게 주는 전략적 교훈은 두 가지다. 혁신적 제품과 비즈니스 모델을 얻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영역에서 도전적인 과제를 받아들이면서 변이를 일으켜야 한다는 것이 첫번 째다. 해오던 일을 더 열심히 하는 것으로는 결코 진화가 일어날 수 없다. 또한 막연히 먼 미래를 볼 것이 아니라 지금 눈앞에 주어진 문제에 집중해서 좋은 해법을 선택하고, 그 결과를 전승하면서 다음 단계로 빠르게 나가야 한다는 것이 두 번째다.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생물 세계의 진화과정을 ‘눈먼 시계공’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는데, 이케아의 사례는 혁신의 진화과정이 ‘근시적 개미’에 가깝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미래의 정답을 알고 있는 천재의 창의력이 아니라 눈앞에 닥친 도전과제를 하나씩 해결해가면서 끊임없이 경로를 수정해가는 개미의 집요함이 기술혁신의 비밀이다.

변이-선택-전승이라는 기술혁신의 진화과정은 혁신생태계를 고민하는 국가정책의 관점에서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무엇보다 개방적이고 도전적인 환경을 조성해서 다양하고 혁신적인 변이가 생길 수 있는 인센티브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폐쇄적이고 도전이 없는 생태계는 필연적으로 진화가 아니라 퇴화의 증상을 보인다.

과학저술가 케빈 켈리가 재미있는 사례를 제시했다. 심해저나 깊은 동굴 속처럼 외부 자극이 차단된 환경에서는 기생생물에 다시 기생하는 생물이나 암컷의 몸 안에 들어있는 수컷, 다른 생물의 행동을 따라 하기만 하는 생물 등 기이한 공생과 기생생물들이 발달한다. 외부환경으로부터의 도전이 없으면 변이의 힘이 외부에 대한 대응이 아니라 좁은 생태계 안에서 그들끼리에 특화된 변이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 “기존기술을 조합하라”

2000년대 이후 세계시장에서 존재감이 사라진 일본 휴대폰의 퇴화가 딱 맞는 사례다. 2007년 일본 정부의 의뢰로 만들어진 보고서에 의하면 일본의 휴대폰과 가전제품의 경쟁력이 떨어진 것은 글로벌 표준과 동떨어져진 채 일본식 표준을 고집하면서 국내용 변이를 만들어내는 데만 집착했기 때문이다. 보고서의 저자들은 이 현상을 폐쇄된 생태계에서 진화의 방향이 내향적으로 곱아드는 ‘갈라파고스 증후군’이라고 불렀다.

더 넓고 다양한 시장환경과 기술에 접할 수 있도록 국가의 개방성을 높이는 데 기술진화의 성패가 달려있다. 신산업에 대한 규제 체제를 혁신친화적으로 빨리 고쳐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다양한 산업에서 새로운 시도를 할 기회가 있어야 변이가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산업생태계에서 혁신적 변이를 위한 조합의 가능성을 높이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기술의 세계에서 도전 과제에 대한 해법으로 만들어지는 새로운 변이는 기존 기술들의 조합으로 생긴다. 스티브 잡스가 고백했듯 아이폰도 기존의 휴대폰과 전자수첩, MP3, 디지털카메라와 터치스크린, 컴퓨터 운영체제 등을 창의적으로 조합해 만든 것이다. 성공적인 조합은 전승돼 다음 단계 혁신적 기술을 만들어내는 재료가 되고, 이 과정이 반복되면 조합의 가능성 자체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게 된다. 흥미롭게도 생물의 세계에서는 사자와 악어 간에 유전자가 섞일 수 없는 종간 장벽이란 것이 있지만, 기술의 세계에서는 그런 장벽도 없다. 그래서 하늘을 나는 자동차나, 현실과 사이버공간을 융합하는 메타버스처럼 경계를 넘나드는 융합상품들이 끊임없이 탄생하고, 그 속도 또한 더 빨라지고 있다.

다양한 조합이 일어날 수 있는 생태계에서는 혁신적 해법이 나올 가능성이 커지고, 진화의 속도가 빨라진다. 실리콘밸리의 기술진화 속도가 남다른 것도 바로 이 조합의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국내외의 기업과 대학, 연구소, 그리고 정책기관이 계속 만나도록 자극해야 한다. 업종이 다른 기업 간에도 경험의 공유가 더 많이 일어나도록 판을 깔아줘야 한다. 외국의 인재를 더 많이 받아들이고, 우리 인재를 더 많이 내보내 인재풀의 다양성을 높여야 하는 이유도 조합 가능성이 진화의 또 다른 열쇠이기 때문이다.

한국 양궁이 보여준 공정성·투명성

혁신생태계에서 공정하고 투명한 선택 기준이 중요하다는 점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심지어 한국 양궁의 성공 요인으로 모두 공정한 선발절차를 꼽지 않는가. 다만 혁신의 대안을 선택하는 데 있어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가도 중요하지만, 사회적으로 바람직한가도 중요하다. 특히 공공재원을 투자하는 경우에는 실패 가능성이 크지만, 더 도전적이고, 장기적인 영향을 미치는 원천기술 혹은 사회의 지속가능성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기술의 씨앗들을 선택해줘야 한다.

기술진화의 전승 과정에서는 선택 과정에서 탈락한 실패의 경험을 축적하고 활용하는 문화, 그리고 실패했더라도 재도전할 수 있는 제도적 환경이 중요하다. 그래야 혁신생태계 전체에서 더 다양한 조합이 생기고, 결과적으로 혁신적 아이디어의 출현 가능성이 커진다. 산업계에서 경험을 쌓아온 기존 인력을 재교육하는 것도 진화논리의 관점에서 보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과제다. 기존의 경험에 다른 산업의 경험과 최신 기술지식을 전수해주면 융합적인 변이가 생길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퇴화하지 않고 진화하려면 매일 새롭게 도전해야 한다. 생물도 기술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