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재신임 투표는 二重 위헌행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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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정치판이 소용돌이칠 때면 으레 등장하는 것이 헌법 논쟁이다. 그래서 헌법은 동네북 신세를 면치 못한다. 지난 주말 노무현 대통령이 자신의 핵심 측근인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의 SK자금 수수 의혹과 관련해 "수사결과가 무엇이든 이 문제를 포함, 그동안 축적된 국민의 불신에 대해 재신임을 묻겠다"고 선언했다. 盧대통령은 13일 시정연설에선 '12월 15일 전후'해 '국민투표'로 하자는 재신임을 묻는 시기와 방법까지 제시했다.

이 재신임 국민투표제를 헌법해석론의 관점에서 검토해 본다면, 이것은 한마디로 말해 헌법상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 헌법상 대통령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는 경우는 임기 만료에 따른 퇴임, 탄핵심판에 의한 해임, 그리고 자진사임(건강의 이유나 무력감 등으로) 등 세 가지 경우밖에 없다. 우리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권력구조는 대통령 책임제이고 이 제도의 핵심은 임기의 절대적 보장인 것이다.

이러한 임기제의 보장에 대해 예외를 인정하려면 헌법에 이에 관한 명문의 규정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임기제에 대한 예외로서 우리 헌법은 사망과 탄핵심판에 의한 해임만 규정하고 있을 뿐 '재신임 제도에 의한 해직이나 사임'에 관해서는 아무런 규정도 두고 있지 않다. 헌법상 근거가 없음에도 재신임 국민투표에 따라 대통령이 해임되거나 사임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대통령 책임제 자체와 대통령 임기제를 유명무실하게 만드는 위헌적 행위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위헌논리는 권위주의 체제 하에서 대중조작을 위해 즐겨 악용되었던 방법, 즉 재신임 문제를 어떠한 정책과 결부해 국민투표에 부의하는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어떠한 정책과 결부시킨 재신임 국민투표제는 정책에는 반대하나 재신임에는 찬성하는 경우-그 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국민의 진의가 왜곡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국민투표제가 아닌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정책과 재신임을 결부시킨 국민투표제는 국민투표제에 관한 헌법 제72조는 물론 대통령 임기제에 관한 헌법 제70조 전단에도 위반되는 이중적 위헌 행위가 된다.

대통령이 굳이 자신의 무능을 통감하거나 측근들의 부정.비리와 연루돼 책임지고 싶어 한다면 재신임 여부를 물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사임하면 되는 것이다. 헌법상 공직자는 스스로 사임할 권리를 누구나 가지기 때문이다.

또한 盧대통령의 선언처럼 측근의 부정.비리의혹과 관련해 재신임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려 한다면 앞으로 측근의 부정.비리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재신임 국민투표를 실시하려 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盧대통령의 임기 중에는 국민투표만 하다가 5년 세월 다 보내게 될지 모른다.

이러한 이유로 헌법 제72조의 '대통령은…국가 안위에 관한 중요정책을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다'라고 할 때의 국가안위의 개념 중에는 '대통령의 재신임 여부'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정치적 역학관계의 관점에서 볼 때 盧대통령으로서는 재신임안을 선언함으로써 정치적 수세에서 벗어나 정치적 여유를 갖게 되었다. 국민투표가 실시되기까지-최소한 몇개월에서 국민투표법 개정협상을 교묘히 활용할 경우에는 좀더 오랜 기간-야당과 일반 국민의 정치적 공세나 비판이 가해질 적마다 "그러니 재신임을 묻는 것 아니냐"면서 그때까지는 참아달라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검찰수사의 결과 최도술씨에 대한 SK 측 자금의 제공에 盧대통령이 책임져야 할 사태가 발생하는 경우(이런 경우가 되면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가 가능하다) 盧대통령은 예상되는 야당 측의 탄핵소추 공세에 대해서도 재신임 투표제를 내세워 그 공세를 무력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다 대선 당시 보여준 '노사모'등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재신임까지도 얻게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도 은근히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정치적 도박의 결정적 동기는 뭐니뭐니 해도 투표 결과가 어떻게 되든 盧대통령으로서는 얻을 것은 많은 반면, 잃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계산일 것이다. 재신임 투표에서 패배하더라도 이런 저런 구실을 붙여 사임을 거부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헌법상 근거가 없는 재신임 국민투표는 아무런 법적 구속력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재신임 국민투표제라는 것은 盧대통령으로서는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는 회심의 카드를 뽑은 것이 될 터이나, 야당들로서는 속된 표현을 빌린다면 '피박'을 뒤집어쓴 격이 되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권영성 한림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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