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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바람을 부르는 바람개비 54. 모범생의 탈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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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중학교 2학년 때 단짝이었던 '세 별 자매'가 기념 촬영했다. 왼쪽부터 김진렬(6·25 때 행방불명), 조순주(작고), 필자.

청소년기에는 착한 모범생이라도 탈선의 유혹에 쉽게 빠질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나라고 학창시절 일상에서 벗어나고픈 '일탈(逸脫)'의 유혹이 왜 없었을까. 친구들처럼 멋을 내고 싶었고, 이성에 대한 관심도 있었다.

이리여중 2학년 때의 일이다. 당시 나와 같은 반 친구 세 명은 교내에 소문난 단짝 친구였다. 성적이 우수했고, 행실도 올곧아 선생님들은 우리 셋을 일본말로 '삼바가라스'(三羽鳥)라고 부를 정도로 귀여워했다.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손가락질 받지 않으려고 신경을 썼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내일은 학교에 가지 말고, 한번 망가져 보자"고 모의했다. 급우나 선생님들 사이에 공인된 모범생인 우리의 그런 모의는 '죽을 각오'를 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등교거부'를 하고 거리를 배회하리라곤 우리 자신도 생각하지 못했던 엄청난 '사건'이었다.

아침 일찍 우리는 이리에서 기차를 타고 1시간 거리인 전주로 갔다. 그리고는 마음껏 시내를 돌아다녔다. 여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대낮에 시내를 활보하니, 사람들의 시선은 우리에게 집중됐다. 불량학생으로 비쳤을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철길을 따라 걷는데 건너편에서 오던 남학생 세 명과 우연한 만남이 이뤄졌다. 그 학생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한 친구가 "야! 우리가 지금 이러면 어떻게 해"라며 제동을 걸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허겁지겁 우리는 학교로 향했다.

오후 늦게 나타난 우리를 보고 강영철 담임선생님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믿었던 아이들이었으니 기가 막혔으리라. 선생님은 "니들 나쁜 짓 하고 왔지"라며 호되게 꾸짖으셨다.

이런 일도 있었다. 고교시절 단짝 친구인 박지홍(30대 후반에 서울의대 입학)과 월반(越班)시험 공부를 하다가 호기심에 담배를 피워본 것이다. 어른들 눈을 피해 이불을 뒤집어쓰고 담배에 불을 붙여 뻐끔거렸으니 그 뒤는 독자들의 상상에 맡긴다. 그 일로 다시는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다.

서울의대에 입학하고 6.25 전쟁이 터져 전주의 전시연합대학에서 공부하던 시절이었다. 나를 포함해 하숙집에서 같은 방을 쓰던 여학생 네 명이 일요일에 외출을 했다. 한껏 치장을 하고 시내를 들어섰는데, 같은 수의 군인이 탄 지프가 우리 앞에 섰다. 서울대 독문과와 법대를 다니다 군에 입대했다며 말을 걸어왔다. 키도 훤칠하고 늠름했다. 우리는 그 지프를 타고 종일 데이트를 즐겼다. 이성을 보면 고개가 숙여지고 가슴이 쿵쿵 뛰던 때였는데,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밤늦게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점심.저녁도 거르고 밤늦게 돌아온 우리를 본 주인 아주머니가 "세상에, 말만한 처녀들이…"라며 혀를 찼다. 하숙집에 삽시간에 소문이 나고 다들 흉을 보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반성문을 썼다. "이렇게 공부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해 주신 부모님과 가족들을 봐서라도 이러면 안 되는데"라며 누군가 눈물을 떨구기 시작했다. 그날 우리는 눈물을 찔끔거리며 밤새 반성문을 썼다.

부모님의 절실하고 한없는 사랑, 그것이 아이들을 올바른 길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힘이란 걸 깨달았다.

이길여 가천길재단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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