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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에 발만 얹으면 내 입에선 저절로 ‘관세음보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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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보니 지금 알겠다.
내 인생에 이 시간
나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고
내가 나를 사랑하고 있네.

-『시인 할머니의 욕심 없는 삶』 중에서

황보출 할머니가 SKT 사옥 내 '미디어월'에 전시된 본인의 작품을 둘러 본 뒤 소감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 SK텔레콤]

황보출 할머니가 SKT 사옥 내 '미디어월'에 전시된 본인의 작품을 둘러 본 뒤 소감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 SK텔레콤]

28일 서울 을지로 SK텔레콤 사옥 로비와 외벽에 설치된 ‘미디어월’에는 이런 시가 그림과 함께 영상 작품으로 전시돼 있다. 일흔이 넘는 나이에 처음 한글을 배우고, 여든 이후 두 권의 시집을 낸 황보출(88) 할머니가 친필로 쓴 자작시와 그림들이다.

SK텔레콤은 지난 3월부터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는 작가와 어르신ㆍ발달장애 예술가 등의 작품을 음악과 함께 미디어 아트 형태로 전시하고 있다. 이번에 전시된 작품은 황보 할머니의 두 번째 시집(총 4권) 중 『시인 할머니의 욕심 없는 삶』과 『시인 할머니의 거짓 않는 자연』에 담긴 시다.

이 작품을 감상한 한 30대 여성은 “작품을 보고 감명받아 제주도의 헌책방에까지 연락해 절판된 시집을 구했다”고 말했다. 무엇이 세대도, 살아온 이력도 다른 이들의 마음을 끈 것일까.

경북 포항에서 막내딸 가족과 함께 살고 있는 황보 할머니를 지난 26일과 28일 전화로 인터뷰했다. 처음 통화를 했던 26일 그는 밭일을 끝내고 막 막걸리 한 사발을 마신 참이었다. SK텔레콤 사옥에 전시된 자신의 작품을 본 소감을 묻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쓴 글인데 쪼가리 쪼가리 뜯어서 작품으로 만들어 놓으니 느낌이 달랐다. 내 글씨가 이리 예뻤나 싶었다”며 웃었다.

SKT의 사옥 로비와 건물 외벽에 설치된 '미디어 월'에 전시 중인 황보출(88) 할머니의 시와 그림 작품. [사진 SK텔레콤]

SKT의 사옥 로비와 건물 외벽에 설치된 '미디어 월'에 전시 중인 황보출(88) 할머니의 시와 그림 작품. [사진 SK텔레콤]

서럽고 어려웠던 삶을 시로 옮겨

처음부터 그의 시가 이렇게 밝고 긍정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학교 문턱도 밟아보지 못한 채 열아홉에 시집 가 8남매를 낳았다. 자식만큼은 제대로 공부시키겠단 욕심에 담배 농사부터 새벽 장사까지 허리가 휠 정도로 일했다. 남편은 61세 이른 나이에 골수암으로 세상을 떴고, 시어머니마저 “외아들을 앞세울 수 없다”며 아들이 숨지기 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첫 시집 『‘가’ 자 뒷자리』(2017년)는 이런 자신의 한 맺힌 삶을 토해내듯 써내려간 작품이다. 피난 시절을 그린 ‘배고픈 슬픔’, 쬐는 불에 양말 타는 줄 모르고 장사했던 ‘새벽에 시장에 가면’, 시집살이의 서러움을 담은 ‘빨래’ 등이다.

그는 집안에 줄초상이 났을 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내가 못 배워서 ‘자식은 눈 밝게 해줘야 한다’고 욕심낸 게 잘못이었지요. 몸 약한 남편이 나 따라 힘들게 일하느라 일찍 떠난 거란 생각도 들고…. 영감한테 미안하고, 외아들 잃은 시어머니한테 미안했지요. 그러곤 3년을 아는 사람 볼까 봐 고개를 못 들고 다녔어요.”

이런 마음은 ‘남편님 물신은‘이란 시에 고스란히 담겼다. 발에 무좀이 심해 목장갑으로 물신(물에서 신는 신)을 만들어 신던 남편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을 담은 시다.

남편님 물신은 목장갑입니다.
발에 무좀이 심해서
장갑으로 물신을 만들어 신고
떨어지면 버려서
논둑마다 장갑 물신이 가득합니다.
십 년이 지나도 우리 논둑에는
남편님 신던 목장갑이 있습니다.
-‘남편님 물신은’ 일부

황보 할머니가 한글에 눈뜬 건 2003년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에서 막내딸과 함께 살면서다. 딸의 권유로 이문동에 있는 ‘푸른 어머니 학교’를 다니면서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가’ 자 뒷다리’도 몰랐던 그는 이곳을 15년간 한글을 배웠다. 딸이 결혼해 인천에서 살 땐 지하철을 타고 왕복 5시간을 오가며 학교를 다녔다.

지하철 5시간 왕복하며 15년 배운 한글  

황보출 할머니가 친필로 쓴 자작시와 그림 작품들. [사진 SK텔레콤]

황보출 할머니가 친필로 쓴 자작시와 그림 작품들. [사진 SK텔레콤]

“15년을 다녀도 받침을 틀렸어요. 그래도 학교에서 하라카는(하라고 하는) 건 다했어요. 학교에서 일기를 쓰라 해서 썼는데, 국어 선생님이 시를 해도 되겠다 해서 일기를 쓴 게 시집으로 나온 거지요. 그 뒤로 아, 이렇게 쓰면 시가 되는구나 생각하고 시를 썼지요. 시를 쓰다 보니까, 또 시가 책으로 나오니까 ‘내 인생도 괜찮네’ 싶더라고요.”

그러면서 생각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애써 키운 자식들이 하나둘 연을 끊는 데 대한 서운함과 원망도 사라졌다. 도리어 자신의 욕심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객지 생활을 했던 자녀들의 마음이 이해됐다.

“내 욕심대로 자녀 교육 시켰는데, 어거지로 학교만 보낸 것이 잘못한 것 같아요. 내 욕심 때문에 아이들이 초등학교때 서울로 학교를 가서 고생을 많이 했지요. 요즘은 그런 생각도 들어요. 밭에 가서 콩 숨가(심어) 놓고 콩 올라오는 것을 보면 이렇게 사랑스러운데, 자식들 키울 때 저렇게 사랑을 주고 키웠으면 자식들이 지금 엄마를 어찌 생각했을까 하고요. 처음에는 내가 이만큼 해줬는데 하는 마음이 들었는데 지금은 자식들이 저를 앞서가지 않은 것만으로 감사합니다.”

세발자전거에 참깨 싣고 “관세음보살”     

황보출 할머니가 호박에 물을 주기 위해 삼륜 자전거에 물을 싣고 텃밭으로 이동하고 있다. [사진 황보출 할머니 가족]

황보출 할머니가 호박에 물을 주기 위해 삼륜 자전거에 물을 싣고 텃밭으로 이동하고 있다. [사진 황보출 할머니 가족]

그는 요즘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기도로 하루를 시작한다. 날이 밝으면 집 근처 400평짜리 텃밭에 참깨와 들깨·콩·고구마·고추를 가꾼다. 수확한 작물은 삼륜 자전거에 실어 시장에 내다 판다. 볕이 뜨거울 때는 집으로 들어와 글 한장 쓰고 구름 하나 그린다. 요즘 그의 스케치북엔 재치있는 천성이 묻어나는 글귀가 그득하다. 채소를 내다 팔아 번 돈으로 외손녀에게 학원비로 30만원을 줬더니 손녀가 “1000원짜리 열 개만 받고 안 받는다” 하여 딸을 줬는데, 결국 용돈으로 자신에게 되돌아왔단 내용을 담은 ‘돈은 돌고 돌아 돈이다’라는 시 등이다. 자연에 대한 애정과 죽음을 관조적으로 바라보는 시도 많아졌다.

나무 한 그루 춥고 하니
추운 겨울잠 자고 깨어나
새싹이 나오고 귀엽다.
갈 때도 자연으로 갈 텐데
-『시인 할머니의 거짓 않는 자연』 일부

“젊을 때는 몰랐어요. 자연도 눈에 안 뵈고 돈 욕심을 따라 일만 했는데 늙고 나니까 자연이 예쁘구나, 자연은 욕심도 없네 하는 생각이 들고 그래요. (작물이) 비가 와서 죽으려고 하다가 다시 올라오면 ‘수고했다, 사랑한다’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와요. 그러다 일생을 마감해야지요. ”

그는 28일에도 깻잎·호박잎·완두콩을 자전거에 싣고 오천 시장을 쌩하고 다녀왔다.
“자전거를 타고 시장에 가면 차가 쌩쌩하고 달리는데, 어머나, 내가 운전을 잘해(웃음). 자전거에 발만 얹으면 내 입에선 관세음보살-. 감사하다, 감사하다는 소리가 절로 나와요.”

김경진 기자 kjin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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