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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평화의 기회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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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최근 이스라엘-레바논 사태로 양국의 도시와 마을들이 불타고 있다. 몇 주 전만 해도 이런 사태는 상상할 수 없었다.

사태의 중심에 있는 레바논의 헤즈볼라를 테러 단체로 보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로켓.미사일과 같은 각종 무기를 갖추고 있으며, 사설 군대와 테러 조직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레바논 안에서 또 하나의 정부로 행세하고 있다. 2000년 이스라엘이 레바논에서 철수한 뒤 국경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레바논 정부가 아니라 헤즈볼라다.

헤즈볼라는 현재 레바논 정부의 장관 두 명과 국회의원 여러 명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렇지만 레바논 정부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지 않는다. 시리아와 이란 정부의 이익을 우선한다. 군사적 측면에서 특히 그렇다. 한마디로 꼭두각시인 셈이다. 이것이 바로 이번 사태의 본질이다.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역시 시리아와 이란의 영향력을 받고 있다. 합법적인 선거로 정권을 장악한 하마스는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최근 이스라엘군 부대를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군인 여러 명이 숨지고 한 명은 납치됐다. 이스라엘은 곧바로 팔레스타인 측을 보복 공격했고, 인명 피해를 본 팔레스타인인들은 하마스를 더욱 지지하게 됐다. 결과적으로 하마스의 계산대로 된 것이다.

며칠 뒤 헤즈볼라는 하마스를 그대로 따라 국경을 지키던 이스라엘 군인 두 명을 납치했다. 이스라엘 입장에선 하마스와 헤즈볼라가 협력해 반이스라엘 전선을 구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일은 모두 당시 러시아에서 열린 G8(주요 8개국) 정상회의를 겨냥한 것이다. 원래 이 회담에서 주요 의제는 이란 핵 문제였다.

이스라엘-레바논 사태는 이스라엘과 전체 아랍 세계 사이의 갈등이 아니다. 팔레스타인의 하마스와 지하드, 레바논의 헤즈볼라, 그리고 시리아.이란이 이스라엘과 벌이고 있는 갈등이다. 이들은 이스라엘과는 대화조차 하지 않는 단체와 정부다.

그런 점에서 이들이 이번 사태로 얻으려는 목적을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팔레스타인 내부에서조차 압박을 받았던 하마스를 구해주는 것이다. 둘째, 레바논이 민주화되고 시리아와 멀어지는 것을 막는 일이다. 셋째, 이란 핵 문제에 쏟아진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는 것이다.

아랍 세계의 온건한 정부들은 이번 사태의 핵심을 이 지역 내 주도권 다툼으로 보고 있다. 시리아는 레바논과 팔레스타인에서 주도권을 쥐고 싶어하고, 이란은 아랍 세계 전체에 주도권을 행사하려고 한다. 그러나 사태는 이들이 원하는 방향과는 다른 곳으로 간 듯싶다.

이들이 이스라엘의 확고한 결심과 힘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이번 사태를 생존과 직결된 일로 보고 있다. 그래서 레바논이 사태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기는 이미 늦은 것 같다.

이스라엘이 레바논에서 전면전을 벌일 가능성은 작다. 오히려 유엔이 레바논 내 모든 무장 단체에 해체를 명령할 수 있다. 온건한 아랍 국가들은 평화를 촉구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미국이 레바논 사태에 개입할 명분을 줄 수 있게 된다.

결국 이번 사태를 해결할 열쇠를 이스라엘이 쥘 수밖에 없다. 시리아는 실리를 취할 가능성이 크고, 그렇게 되면 혼자 남은 이란은 이번 사태를 뒤에서 조종할 능력을 잃게 된다. 팔레스타인도 이스라엘과의 경계 문제에 보다 현실적으로 접근할 것이다.

그래서 잘 생각해야 한다. 이번 문제는 이스라엘과 아랍 세계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도 걸려 있고 유럽 국가도 큰 관심이 있다. 이런 점에서 이번 사태는 이 지역을 평화로운 곳으로 바꿀 수 있는 기회로도 볼 수 있다. 제발 이번에는 기회를 놓치지 말았으면 좋겠다.

요슈카 피셔 전 독일 부총리 겸 외무장관

정리=강병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