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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폭탄은 양념이 아니고 폭력이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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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김정기 한양대 정보사회미디어학과 명예교수

김정기 한양대 정보사회미디어학과 명예교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심정과 같은 것일까. 문파라 불리는 지지자들의 문자폭탄에 대한 대통령과 여당 정치인들의 태도가 딱하다. 지난 10일 대통령 취임 4주년 연설 후에 제비뽑기로 선정된 기자 20명의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대통령은 디지털 정보기술의 발전으로 표현 수단이 다양화되었다면서 “문자로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정치하는 분들이 그런 문자(폭탄)에 대해서 좀 더 여유 있는 마음으로 바라봐도 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예의를 갖추고 상대를 배려하고 공감받고 지지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해주기를 당부드리고 싶다”는 말도 처음으로 덧붙였다.

언어공격으로 타인 생각 통제 #디지털시대의 가치 부정·훼손 #코로나19 바이러스 같은 재앙

그러나 문자폭탄은 ‘여유 있는 마음으로 바라볼’ 표현 수단이 아니다. 단호하게 대처하고 척결해야 할 폭력이다. “경쟁을 흥미롭게 만들어주는 양념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2017년 19대 대통령 선거 후보 초청 토론회(2017년 4월 MBN 개최)에서 극성 지지자들이 당내 경선 상대 후보에 가한 문자폭탄과 악플에 대한 대통령의 답변이다. 2018년 1월 신년 기자회견에서는 “격한 표현을 하는 지지자들에게 전할 말이 없냐”는 질문에는 “저와 생각이 같든 다르든 유권자인 국민들의 의사표시로 받아들인다”고 했다. 서울·부산시장 재·보선에서 참패한 후에 치른 민주당 대표와 최고위원 선거에서는 문자폭탄을 ‘민심의 소리’라고 하는 옹호론이 활보했다. 그러나 문자폭탄과 그에 대한 방관과 옹호는 디지털시대의 시대정신에 반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소통카페 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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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폭탄은 막말·폄하·차별·혐오·모욕·욕설·위협·공포를 야기하는 폭력적인 문자를 수백 수 천통씩 집중적으로 특정인에게 보내는 공격행위다. 언어를 통한 공격은 ‘자신의 입장을 주장하거나 변호하고, 상대의 주장을 논박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인격·능력·자존심을 공격하여 상처를 주고, 부정적으로 느끼게’ 하여 심신 모두에 단기적·장기적으로 아주 나쁜 결과를 야기한다(『aggressiveness』, Infante). 멀리 갈 것도 없다. 여당 초선의원들이 조국 사태 등에 대해 여당이 좀 반성하자고 했다가 만신창이가 되어 반성을 취소했다. 가족 모독, 비하, 성희롱까지 무차별적으로 24시간 욕을 먹다보면 멘탈 붕괴가 온다고 고백한다. 비정치 분야도 마찬가지다. 문자폭탄의 폭격을 맞고 극단적 선택을 한 연예인이 얼마인가.

디지털 시대는 카카오톡, 페이스북, 트위터,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의 소셜 미디어를 통해 인류가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소통방식을 출현시켰다. 하고 싶은 말을 자신이 직접 정보로 만들어 다른 사람에게 유통시키는 정보의 주권자가 된 것이다. 자유로운 정보 생산과 이용은 소수 엘리트가 정보를 독점하고 권력을 행사하던 수직적 사회에서 탈피하여 수평적 사회로 전환을 가져오고 있다. 특정 자격, 신분, 성별, 직업, 재산, 나이에 관계없이 누구나 자기의사를 표현하고, 사회적 이슈와 공동체 운영에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투명한 공개사회. 소통의 공간을 넓혀 풀뿌리 민주주의 시대가 꽃필 것으로 예견되었다. 그러나 소셜 미디어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지 20년도 안 되어 오히려 민주사회로 발전하는 데 부정적인 행태들이 나타났다.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여론을 조작하고, 댓글로 민의를 변질시키고, 가짜 정보로 민주주의와 공동체의 결속을 손상하고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위협과 강압의 언어공격을 통해 타인의 생각과 행동을 획일적으로 통제하려는 문자폭탄은 디지털 시대의 가치를 훼손하는 행위다. 다른 생각, 다른 의견, 다른 토론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공산주의 체제와는 다르게 생각이 동일하지 않은 타자와 함께 공존과 공생을 전제하는 민주사회의 철학을 부정하는 것이다. 타자를 현존하게 하지 않고, 타자를 경청하지 않고, 타자를 추방하는 사회(『타자의 추방』, 한병철)는 정상이 아니다. 문자폭탄은 양념도 민심도 아니다. 폭력이고 재앙이다.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할 수 없는 범죄행위다. 코로나19 바이러스 못지않게 우리 공동체의 건강을 위해 척결해야 할 디지털 시대의 백해무익한 바이러스다.

김정기 한양대 정보사회미디어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