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걸리버여행기

‘전략적 변곡점’서 신속 대응, 인텔·TSMC 성공 이끌어

중앙선데이

입력 2021.05.22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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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7호 27면

[디지털 걸리버여행기] 그로브·창의 반도체 리더십

인텔을 세계적 회사로 키운 앤디 그로브(왼쪽)는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고 주장했다. [중앙포토]

인텔을 세계적 회사로 키운 앤디 그로브(왼쪽)는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고 주장했다. [중앙포토]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 인텔을 최고의 반도체 기업으로 만든 CEO 앤디 그로브가 한 말이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대전환의 시기에는 과거의 룰이 더는 통용되지 않는 전략적 변곡점을 빠르게 인식하고 어려운 의사결정을 과감하게 내리는 리더가 필요하다.

인텔 키운 앤디 그로브
일본 추격으로 위기 맞은 메모리
CPU로 주력 분야 바꿔 승승장구

TSMC 설립 모리스 창
반도체 위탁 생산 플랫폼 만들어
세계 최초 파운드리 지속적 혁신

수학적으로 변곡점은 곡선이 오목에서 볼록으로 바뀌는 점이다. 하지만 그로브의 전략적 변곡점은 ‘점’이 아니다. 절박한 마음으로 헤쳐 나가야 하는 길고도 고통스러운 싸움의 과정이다.

그로브는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 무어가 1968년 페어차일드를 나와 인텔을 창업하자 따라 나와 인텔의 세 번째 직원이 됐다. 1987년 두 창업자에 이어 세 번째 CEO가 됐다. 1998년 암으로 CEO를 그만둔 후에도 2004년까지 이사회 의장으로 남아 있었다.

오늘날 인텔은 다시 위기에 처해 있다. PC 시대의 인텔 인사이드 전략은 모바일과 클라우드 시장을 장악한 애플, 구글, MS 같은 기업에 가려 더는 먹히지 않는다. 가성비가 좋은 인텔 호환 CPU를 만드는 다윗 AMD가 인텔의 아성을 위협하고 있다. GPU 기업 NVIDIA가 인공지능 클라우드 컴퓨팅의 신생 다윗이 됐다.

인텔 공동창업자 노이스는 1959년 페어차일드에서 세계 최초로 실리콘에 전자 회로를 평면적으로 배열한 집적회로를 발명했다. 이 자부심을 계승한 인텔은 제조 팹(fab)을 아직도 보유하고 있는 회사다. 한동안 팹 경쟁력이 인텔 CPU 성능에 기여했다. 반도체 회로를 미세화할수록 CPU 속도도 빨라지고 에너지 소모도 줄어들기 때문이다. 지난해 완공된 인텔의 최신 팹은 10㎚(나노미터·1㎚는 10억 분의 1m) 공정이다.

그로브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

TSMC 창업자 모리스 창은 인텔과 중국보다 삼성을 경쟁자로 꼽고 있다. [EPA=연합뉴스]

TSMC 창업자 모리스 창은 인텔과 중국보다 삼성을 경쟁자로 꼽고 있다. [EPA=연합뉴스]

인텔은 ‘틱-톡 전략’에 따라 새로운 CPU를 내놨다. 틱 주기에는 팹 공정을 미세화하고, 톡 주기에는 CPU 설계를 개선했다. 최근 들어 공정 미세화 주기가 길어지고 있다. 인텔 팹의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반면 AMD는 2008년 자체 팹을 글로벌 파운드리로 분사해 매각하고 반도체 설계만 하는 팹리스(fabless) 회사가 됐다. AMD는 최신 CPU를 파운드리 1위 기업 TSMC의 5㎚ 공정을 이용해 생산한다. NVIDIA는 1993년 창업할 때부터 TSMC에 위탁 생산한 팹리스 회사이다. 막대한 투자를 요하는 인텔의 자체 팹은 계륵(鷄肋)이 됐다. 올해 2월 인텔은 486 CPU를 설계했던 전직 CTO 패트릭 겔싱어를 10여 년 만에 CEO로 복귀시켰다. 그는 200억 달러(약 22조5000억원)의 투자로 새로운 팹을 구축하고 파운드리 비즈니스를 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전략적 변곡점에서 수년을 허비한 인텔을 겔싱어가 되살릴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 한다.

인텔은 초기에 메모리 반도체 회사였다. 첫 제품은 타사에 비해 두 배 정도 빠른 64비트 메모리였다. 1024 비트 메모리 칩을 내놓으면서 1970년대 메모리 시장의 선도기업이 됐다. 같은 시기 4 비트에서 시작해 16비트 8086 마이크로프로세서를 개발했지만 인텔 하면 메모리칩을 연상했다. 당시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I)는 인텔보다 훨씬 큰 반도체 회사였고 메모리 분야의 경쟁사였다.

1980년대가 되자 일본의 메모리 제조업체들이 전면에 등장했다. 1970년대 후반 일본 통산성 주도로 전략적 대규모 투자를 한 결과였다. 1985년을 기점으로 일본이 시장 점유율에서 미국을 앞서기 시작했다. 미국과 일본의 점유율은 1978년 각각 60%, 30% 정도에서 1986년에는 역전됐다.

1985년 하반기 스탠퍼드대 유학생이던 나는 6개월간 텍사스 댈러스의 TI 중앙연구원 AI 랩에서 인턴으로 일했다. TI의 거대한 DRAM 반도체 라인을 처음 본 전기컴퓨터공학 전공의 유학생에게 TI는 경외의 대상이었다.

차이잉원 대만 총통(오른쪽)으로부터 훈장을 받고 있는 모리스 창 . [사진 위키피디아]

차이잉원 대만 총통(오른쪽)으로부터 훈장을 받고 있는 모리스 창 . [사진 위키피디아]

DRAM 설계 전문가인 중국계 TI 펠로우를 만난 후 우리나라는 과연 이런 반도체 산업을 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이때가 TI로서는 전략적 변곡점의 시작이었다. TI의 메모리 사업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고 TI는 사업 방향을 신호 처리 반도체로 바꾸었다. 일본에 이어 한국이 메모리 사업에 뛰어들었다. 인텔은 일본 기업에 맞서 고부가 가치 제품으로 맞섰지만 규모의 게임에서 앞서 나간 일본 앞에서 과거의 룰은 통하지 않았다.

1985년 중반 그로브는 당시 CEO였던 무어에게 질문을 던졌다. 만약 이사회가 우리를 해고하고 새로운 CEO를 고용한다면 그 CEO는 어떻게 할까요? 무어는 대답했다. “메모리 사업에서 손을 떼겠지.” 그로브가 말했다. “우리가 여기서 나가 새로운 사람으로 돌아와서 메모리 사업을 끝내면 어떻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인텔은 주력 사업을 메모리에서 CPU로 전환했다. 32비트의 386 CPU로 PC 붐을 타고 성장했다.

인텔의 성공적 대전환의 배경에 인텔의 실험 정신이 있다. CPU는 인텔의 주력 분야가 아니었지만 10년간 매출보다 훨씬 큰 비용을 개발과 마케팅에 꾸준히 투자했다. 이 투자가 인텔의 자원을 새로 집중할 사업을 만들었다.

비슷한 시기 TI의 반도체 사업 총괄 수석 부사장 모리스 창(Morris Chang·張忠謀)은 1983년 입사한 지 25년 만에 CEO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사표를 냈다.

중국에서 태어난 그는 1949년 도미해 하버드 신입생이 됐다. 중국인이 인문사회 분야를 공부해 미국에서 성공하기 어렵다고 생각한 그는 1년 만에 MIT로 옮겼다. 하지만 뚜렷한 목표가 없었던 그는 MIT 기계공학 박사 자격시험에 두 번 실패한 후 실바니아(Sylvania)라는 작은 반도체 회사에 취직했다. 이 회사의 한계를 인식한 그는 3년 만인 1958년 TI로 옮겼다. 같은 해 학회에서 후에 인텔을 창업한 노이스와 무어를 만났다.

모리스 창의 능력에 주목한 TI 경영진은 그를 스탠퍼드에 보내 전기공학 박사를 하도록 했다. 1964년 2년 반 만에 박사를 마치고 TI에 복귀한 그는 궁극적으로 TI의 반도체 사업 총괄 책임자가 됐다.

창, 대만 정부서 영웅 훈장 받아

1985년 모리스 창은 대만 산업기술연구원(ITRI)의 원장으로 발탁됐다. 전 부인 등 주변의 반대까지 무릅쓴 결정이었다. 대만 정부는 그에게 해외 기업을 유치해 새로운 반도체 회사를 세워 달라고 요청했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1987년 미국에 비해 2세대 정도 뒤떨어진 ITRI 기술과 2억2000만 달러의 투자금으로 TSMC를 설립했다. 대만 정부가 48%를 투자하고 유럽 기업 필립스가 27%를 투자했다. 인텔과 TI는 참여를 거부했다. 나머지 25%는 12개의 대만 기업들이 출자했다.

창 박사는 TSMC 비즈니스 모델로 반도체 칩 설계 능력은 있지만 비용 때문에 생산 팹을 갖지 못하는 팹리스 회사들을 위한 반도체 위탁 생산 플랫폼을 택했다. 세계 최초의 파운드리가 탄생했다. SW 서비스 회사들에 클라우드 플랫폼을 제공하는 것과 같은 것이 반도체 칩 분야에서 1980년대 말에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전례가 없는 비즈니스 모델은 솔루션은 있지만 문제를 찾아야 하는 도전이었다. 미래의 팹리스 반도체 설계 회사들을 발굴하고 이들과의 신뢰를 구축했다. 1990년 초반 몇 개의 팹리스 회사들이 생겨났다. 대만 출신의 젠슨 황이 창업한 NVIDIA는 TSMC에 의존해 회사를 키웠다.

1994년 대만에서 상장한 TSMC 가치는 약 40억 달러였다. 1997년 뉴욕에 상장할 때는 약 60억 달러가 됐다. 2005 CEO를 물려준 그는 2009년 78세에 위기에 처해 있던 TSMC를 구하기 위해 CEO로 복귀했다. 연구개발(R&D) 투자를 늘리고 팹에 공격적으로 투자했다. 창 박사는 파운드리가 팹리스 회사들의 지속적 혁신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수익률이 40~50%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휴대폰, PC, 가전, 자동차 등 우리 일상생활의 편의를 제공하는 하드웨어와 클라우드 컴퓨터 서버에서 TSMC가 제조한 시스템 반도체를 쓰지 않는 경우를 찾기 힘들게 됐다.

TSMC의 지난해 매출은 455억 달러, 순수익은 173억 달러로 성장했다. 38%의 순수익율이다. 시가총액은 5900억 달러(660조원)다. 같은 날 삼성전자의 시가 총액은 545조원이 었다.

창 박사의 자산 가치는 대략 26억 달러이다. 그의 TSMC 지분은 미미하지만 그의 영향력은 말로 할 수 없다. 90세의 창 박사는 2018년 CEO에서 은퇴해 대만 정부로부터 영웅 훈장을 받았다.

미국과 중국의 디지털 패권 다툼으로 세계 시장은 재편되고 있다. 반도체 산업을 중국을 억제하기 위한 전략적 도구로 보는 미국은 자국의 영토에 반도체 라인을 세우도록 압력을 넣고 있다. 반도체 강국 한국은 전략적 변곡점에 있다. 우리에게 앤디 그로브, 모리스 창 같은 리더가 있는가?

차상균 서울대 데이터사이언스대학원장
서울대 전기공학사, 계측제어공학석사, 스탠퍼드대 박사. 2014~19년 서울대 빅데이터연구원 초대 원장. 2002년 실리콘밸리에 실험실벤처를 창업했다. 이 회사를 인수한 독일 기업 SAP의 한국연구소를 설립해 SAP HANA가 나오기까지의 연구를 이끌고 전사적 개발을 공동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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