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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임상연구를 디자인하는 의사'

중앙일보

입력

다소 긴장감이 도는 다국적 제약회사의 사무실, 좁은 복도를 지나 다다른 방에선 액자 속의 모나리자(?)가 주인보다 먼저 심상한 미소로 나를 반긴다. 잠시 헛기침으로 기척을 알릴 새도 없이 이미 활짝 열려있던 방문은 주인공 앞으로 사람을 쑥 밀어넣는다. 다소 당황한 탓인지 하이톤의 첫 인사가 좁은 방안을 흔들자 가벼운 캐쥬얼 차림에 소년 같은 미소를 뛴 방 주인이 반갑게 손님을 맞아준다.

서울의대 82학번인 최상무는 서울대병원 전공의, 삼성서울병원 전임의, 축령복음병원 수련부장을 끝으로 가운을 벗고 환자를 만나기보다 환자를 만나는 의사를 대하는 일이 더 많은 지금의 제약회사(한국얀센)에 입사, 2005년 1월부로 마케팅부 상무이사로 승진, 국제적 임상과 국내 4상임상 연구를 총괄하고 있다. 쉽지 않은 결정을 내리기까지 결정적인 조언을 해준 이가 현재 삼성서울병원 정신과 홍성도 교수란다. 홍교수는 대학졸업 후 수 십 년간 미국에서 임상활동을 하시다 삼성서울병원 진료를 계기로 입국한 분이다. 미국에서의 의사들의 다양한 역할수행을 보아온 홍교수는 제약회사에서 근무하는 의사들의 역할이 상당히 매력 있는 것임을 강조하며 갈등하는 최상무에게 ‘뒤도 돌아보지 말고 해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물론 그의 조언을 받아 들이게 된 배경에는 최상무가 삼성의료원 전임의 시절 환자나 제자를 대하는 홍 교수의 일관된 자세와 배려심에 반해 처음으로 인생의 멘토(Mentor)로 받아들일 정도로 그의 홍교수에 대한 찐한(?) 존경심이 있었다.

환자를 마음으로 대하는 멘토를 보고 더 오래 임상에 남아 그런 의술을 펼치는 것이 꿈이 될 법도 한데 왜 접었을까? 길고 그럴 듯한 대답을 상상하며 첫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예상외로 간단하고 너무 솔직한 그의 대답인즉, “ 정신과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다 보면 개인의 삶, 어떨 땐 그 가족의 문제까지도 관여하게 됩니다. 솔직히 한 개인으로써 자신은 그렇게 살지 못하면서 누구의 삶에 대해 조언하고 길을 제시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습니다.” 이다. 소년시절부터 책을 너무 좋아해 쟝르를 가리지 않고 읽는다는 그의 독서편력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듯한 답. 다소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의 자기 성찰이 낳은 결과로 해석해도 될 듯 싶다. 그래도 그만둔 데는 뭔가 다른 이유가 더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던진 두 번째 질문, 정신과를 지망하게 된 동기는?
정신과의사로의 길에 대한 결정은 늦게 내려졌다고 한다. 등산을 좋아해 동아리 활동까지 하던 그가 의대 2학년 때 인수봉을 타다 사고만 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지금쯤 수술실에서 심장수술을 하고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그 당시 다친 발목의 후유증으로 오랜 작업을 감당해야 하는 흉부외과의에 대한 꿈을 접고 말았다. 그 사고 이후로 한동안 의대공부로 잊고 있었던 책 읽기에 전념, 한창 독서에 빠져있을 때는 서점을 가면 전시된 책과의 신비한 교감을 느낄 정도였다고. 의대 말엽에 정신과로의 진로를 결정하게 된 것은 당시의 방대한 독서량과 많은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여 외과지망생에서 정신과로의 늦은 진로변경은 환자를 보는 의사가 아닌 제약회사 임상연구담당자로의 이직에도 다소 영향을 미쳤을 것 같다.

그럼 환자를 보는 의사가 아닌 제약회사의 상무로써의 그는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임상과 회사일과의 차이를 묻자 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의 일이나 회사에서 비즈니스를 수행하는 것이나 근간을 이루는 절차는 유사하다고 잘라 말한다. 환자를 보던 의사라서 회사 일에서 경쟁력이 떨어질 이유는 하등 없다는 뜻이다.
그는 주로 의사를 상대로 임상시험을 진행(시험설계-실행-결과의 논문화)하는 일을 맡고 있다. 모든 신약은 허가를 받고 난 다음에도 지속적으로 환자들을 대상으로 좋은 연구결과를 도출해내는 단계(4상단계)를 거친다. 이러한 연구결과는 실제 시장에서 세일즈를 할 때 유용한 자료로 이용이 되는 것으로 시판 제품의 프로모션을 위한 중요한 자료가 된다. 최상무가 현재 하고 있는 이러한 일은 실제 약의 효과를 검증하는 단계인 만큼 환자를 직접 진료한 임상경험과 약에 대한 이해도를 고루 갖추고 있는 사람 즉 현실적으로 의사가 반드시 해줘야 하는 업무라고 덧붙인다.
현재 국내에서는 50여명정도의 의사가 제약회사에 활동 중이다. 최상무는 이들이 하는 일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고 밝히며 국가적으로 BT를 주요 성장 동력으로 간주하고 있는 지금 국제적인 기준에 부합된 일을 하고 있는 제약회사에서 일하는 의사 전문가들이 더 많이 양성되어져야 함을 강조한다.
그 외의 업무로는 관리자로써 소속부서의 직원들의 업무를 중재하고 일을 좀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도록 돕고 격려하는 ‘피플 매니지먼트’의 역할이 있다.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훈련된(?) 탓일까? 최대한 들어줌으로써 문제해결을 시도하려는 자세가 엿보였다.

바쁜 제약회사 근무로 인해 가정생활은 어떨까 궁금해졌다. 대답은 시큰둥하다. 그만큼 가정에 많이 신경을 못쓰고 있는 눈치다. 두 아들과 아내의 이해가 적극 필요해보인다. 그러면서도 요즘 아이들의 과보호에 가까운 부모들의 보살핌에 대해서는 달갑지 않다고 말한다. 지나친 보살핌은 오히려 아이들의 정체성이나 주체성의 결여로 연결될 수 있단다. 부모들이 준 큰 지침 하에 스스로 길을 모색하고 커온 지난 세대에 비해 요즘 세대는 많이 돌봄을 받고 있는 편이라고. 일견 수긍이 가는 주장이다.

다시 책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중고등학교 시절, 도서관에 살다시피 하는 그에게 담당자가 도서관 열쇠를 맡길 정도로 고전소설에 푹 빠져있었다고 한다. 당시부터 다소 호흡이 긴 소설을 읽기를 좋아해서인지 자연과학, 예술, 교양 등 섭렵하는 분야도, 책의 깊이도 수준급이다. 요즘 유행하는 ‘다빈치코드’처럼 다소 호흡이 짧아 보이는(?) 소설은 지양하는 편이란다.
책을 좋아하는 그의 꿈은 뭘까? 읽다 보면 쓰게 되는 것이 대부분의 습성이다 보니 답을 염두에 두고 질문을 던져보았다. 당연 그도 좋은 소설을 쓰고 싶단다. 한 달에 2-3번 떠나는 출장을 좋아하지만 이유는 출장 가서 그 지역을 관광하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출장지에서 처음 맞는 호텔방에서 갖는 ‘사색의 시간’이 너무 좋아서라고. 의식의 흐름을 쫓는 소설 속의 주인공을 읽는 듯한 고백이다. 예술가가 되고 싶지만 본인에게는 그런 천부적인 기질은 없어 보인다는 그. 그가 가진 천재성에 대해서는 짧은 만남만으로 언급하긴 어렵지만 의사로써의 경험, 독서편력 그리고 독특한 사색의 깊이만으로도 그가 쓸 미래의 소설에 즐거운 기대를 안겨주었다.
정신과 전문의, 제약회사 상무이사, 소설가(미래)..
어느 하나도 녹록치 않은 꼬리표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성찰을 생활화하고 있는 그라면 모든 역할에도 중량감 있는 기대를 해도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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