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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마음 읽기

봄에 꽃을 꺾지만 않는다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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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문태준 시인

문태준 시인

김형영 시인이 숙환으로 별세했다는 소식이 전해져왔다. 그리고 바로 며칠 전에 시인의 시선집 ‘겨울이 지나간 자리에 햇살이’를 우편으로 받았다. 별세한 날이 지난달인 2월 15일인데, 시선집 펴낸 날이 같은 날이었다. 아마도 시인은 일생 동안 애써 쓴 시들을 모아 한 권의 시선집으로 엮는 일을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일로 삼은 것이 아니었나 싶었다.

생명 세계 노래한 시에 교감 일어 #무심히, 흐름대로 있어도 좋을 일 #공존과 조화에 사람도 호응해야

시인은 시선집에 실린 ‘시인의 말’에서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새로 태어나고 사라지는 생명들과의 교감 그리고 가끔 거기서 얻은 감동을 시로 꽃피우는 즐거움, 그 은총이야 말해 무엇하리”라고 썼다. 한 생명을 지닌 인간으로서 다른 생명들과 어울려 사는 일, 그리고 그 살림에서 얻게 된 감명과 감격을 시어로 남기는 일에 은총이 있었다고 소회를 짤막하게 밝힌 것이었다. 김형영 시인은 세례명이 스테파노였다. 시인은 스님들과의 인연도 많았다. 법정 스님은 김형영 시인에게 호를 ‘수광(壽光)’이라고 지어줬다고 한다. 병약해 보이는 자신을 위해 오래 건강하게 살라고 지어준 듯하다고 시인은 회고하기도 했다. 나는 시선집을 곁에 두고 시편들을 읽으며 여러 날을 보냈다.

“지금 피는 꽃은/ 지난해 피었던 꽃은 아니어도/ 아름답기 그지없고/ 오히려 새로운 것 같아요.// 하늘을 우러러 피지만/ 향기는 늘 대지에 퍼뜨리고// 네가 꺾지만 않는다면/ 내년에도 내내년에도/ 꽃 피고 새 울어 열매 맺고/ 생명을 품고 익어가지요.// 나무에 혈기가 오르면/ 새들은 한 곡조 더 부르고 싶어/ 이 가지 저 가지 옮겨 다니겠지요.”

인용한 시는 김형영 시인의 시 ‘지금 피는 꽃은’이다. 꽃과 사람과 새의 조화로운 관계를 바라보는 시인의 각별한 안목이 담담한 언어를 통해 잘 느껴지는 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를 조용한 책상에서 한 번 읽고, 또 벚꽃이 한창 만개한 제주의 벚나무 아래에서 한 차례 더 읽었다. 특히 “네가 꺾지만 않는다면”이라고 쓴 대목에 생각이 오래 머물렀다. 내가, 우리가 억지로 이 봄에 봄꽃을 꺾지만 않는다면 새로 핀 꽃은 더 아름답고 더 새롭고, 향기는 더 멀리가고, 새들은 세상에 아름다운 노래를 더 보탤 것이라는 말씀에 크게 공감이 갔다.

그러면서 동시에 화가 김환기의 글이 떠올랐다. “미술은 철학도 미학도 아니다. 하늘, 바다, 산, 바위처럼 있는 거다. 꽃의 개념이 생기기 전, 꽃이란 이름이 있기 전을 생각해보라.” 이 문장의 대강의 뜻은 아마도 언젠가 내가 주워들은 적이 있는 ‘자연법이(自然法爾)’를 일컫는 것이 아닌가 하는 어리석은 짐작도 해보게 되었다. 저절로, 흐름 그대로, 있는 그대로가 진실이요, 진리라는 말씀 아닌가 싶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무심(無心)한 평상심(平常心)이라고 불러도 좋을 듯했다.

더불어 소동파가 “여산의 안개비와 절강의 물결이여/ 와서 보기 이전에는 못 본 것이 한스러웠는데/ 와서 보고 돌아갈 적에는 별다른 것이 아니었네/ 여산 안개비와 절강의 물결이었네”라고 읊은 심사와도 맥락이 조금은 닿아 있는 것이 아닐까도 생각을 해보았다. 실로 여실지견(如實知見)해야 할 일인 것이다.

내친 김에 도록에서 김환기의 그림들을 다시 찾아보았다. 달과 항아리를 그린 그림들을 유심하게 들여다보았다. 김환기는 항아리를 특히나 좋아해 집안 구석구석에 항아리를 놓고 살기도 했다. 다락이나 광, 시렁 위에까지 항아리들을 두었고, 항아리 장사에게 항아리를 살 때에는 항아리값을 깎아서 사본 적이 없었다. 김환기는 우리 자기의 대표로 백자항아리를 꼽았다. 그러면서 백자항아리가 지닌 흰빛이 단순한 백색이 아니라 “모든 복잡을 함축한” 미묘한 백색이라고도 했다. 그리하여 백자에도 “목화처럼 다사로운 백자, 두부살같이 보드라운 백자, 하늘처럼 싸늘한 백자, 쑥떡 같은 구수한 백자” 등이 있다며 “흰 빛깔에 대한 민감은 우리 민족의 고유한 특질인 동시에 또한 전통”이라고 산문을 통해 밝히기도 했다.

요즘 제주에는 꽃이 만개하고 있다.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간만에 꽃을 완상한다. 꽃나무 가지 속에는 새들이 날아와 지저귀고,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날아 옮겨 앉는다. 향기는 화사한 햇살 속에 멀리 퍼지고, 새들도 더 많은 노래를 준비한다. 이 순간만큼은 생명세계가 하나의 항아리처럼 여겨진다. 이 세계가 항아리의 둥글고 매끈한 외관이요, 그 내부 같다. 화엄의 세계 자체 같다. 우리 사람들이 꽃과 새와 어울리면서 이 봄에 꽃을 꺾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우리 사람들이 하늘과 바다와 산과 바위처럼만 있다면 말이다.

문태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