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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남 "'윤잠깐'이라 불린 윤여정, 요즘 보면 말그대로 '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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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남 남기고 싶은 이야기] 예스터데이 〈4〉  ‘쎄시봉’서 만난 사람들

70년대 조영남씨와 윤여정씨. [중앙포토]

70년대 조영남씨와 윤여정씨. [중앙포토]

자! 나는 쎄시봉엘 무혈입성했다. 박수! 짝짝짝! 웬 박수냐? 쎄시봉은 내 인생 전체의 첫 번째 꺾임이었다. 고비하고 비슷한 거다. 쎄시봉, 딜라일라, 도미, 이혼, 무슨 파동 뭐 이런 것들이 꺾임이다.

박원웅·한명숙·이봉조 등 단골 #난 물 만난 고기처럼 즐겁게 놀아 #미대 출신인 ‘쇼쇼쇼’ PD 조용호 #초상화 그리자 “음대생 니가 낫네” #이장순·최영희 등 여성 많았는데 #얼마 안돼 윤여정이 여자 대표 격

교회와 학교만 다니다가 학교도 못 마치고 쎄시봉엘 갔으니까 그곳에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이 첫 번째 꺾임이 되는 거다. 거기 가서 그럼 난 뭘 했나. 팝음악 듣고 노래 부르고 그곳의 사람들을 만나 교제를 트는 것이다.

문지기 ‘아! 젠장’의 용칠이부터 ‘나오라우!’ 주인 아저씨…참! 나는 지난주까지도 나오라우 아저씨가 복싱 선수 출신이란 걸 까맣게 몰랐었다. 그래서 무교동 건달패들이 얼씬도 못 했다는 사실을 자료에서 발견했다.

1976년 TBC 프로 ‘쇼쇼쇼’를 11년간 이끌었던 곽규석(왼쪽)씨가 MC 자리를 위키리, 정윤희씨에게 넘겨 주는 장면.

1976년 TBC 프로 ‘쇼쇼쇼’를 11년간 이끌었던 곽규석(왼쪽)씨가 MC 자리를 위키리, 정윤희씨에게 넘겨 주는 장면.

내가 여기서 만난 사람들과 교회나 학교에서 만난 사람들하곤 많이 다르다. 다들 기분 좋아 보였다.

만난 순서대로 쓰는 건 불가능하다. 쎄시봉의 원조 DJ 판돌이였는데 나중에 교통방송 부장이라고 해서 깜짝 놀란 허건영, 전설의 명동 국립극장 개보수 이후에 사장이 됐다고 깜짝 놀라게 한 구자흥은 서울대 문리대 재학 중이면서 알바로 판돌이를 했던 거다. DJ 겸 개그맨이었던 박상규(무슨 일이 있었는지 일찍 돌아가셨다), 가수 장우 형(나중에 목사가 됐다고 들었다)….

유명 성우 피세영, 무보수로 DJ  

음악평론가 이백천씨.

음악평론가 이백천씨.

그때는 단연 라디오 시대였다. 유명스타급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구가하던 최동욱, 박원웅, 박광희 형님들이 수시로 스쳐 갔고 당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최희준과 함께 ‘포 클로버즈’ 멤버였던 유주용, 위키 리, 박형준을 비롯 ‘노란 샤쓰의 사나이’의 한명숙, 한국의 루이 암스트롱 김상국 등이 왔다 갔다 했다. 연주자들 이봉조, 김광섭, 박선길 등이 단골 음악인들이었다.

‘물 만난 고기.’ 바로 그것이었다. 거기서 노는 게 그렇게 즐거웠다. 나는 선천적인 재미추구자, 재미스트이다. 재미없으면 안 노는 것이 나의 특징이다.

쎄시봉 집의 큰아들로 나중에 TBC에서 PD로 활약하게 되는 이선권 형, 같은 PD 조용호 형, 그리고 그 형들과 형제처럼 지냈던 유명 성우 겸 무보수 판돌이 피세영 형. (수필가 피천득 선생의 큰아들, 일찍이 캐나다로 이민 갔다) 그리고 우리 쎄시봉 터줏대감 이백천 선생님, 나는 피천득 선생이라고 칭했는데 이백천 선생님께는 굳이 ‘님’자를 따로 덧붙였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내가 교회와 대학을 중도에서 나와 50여년이 흐르도록 가장 유일한, 말 그대로의 스승이시기 때문이다. 그보다 나는 지금 무지 급하다. 재미있었던 피세영 형과 조용호 형에 대해 얘기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먼저 세영 형이 어느 날 씩씩대며 들어왔다. 왜 그러냐고 물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007가방을 들고 누굴 만나러 다방엘 들어섰는데 저쪽 먼 구석에서 손짓을 하더란다. 가봤더니 그 사람이 귓속말로 조용하게 ‘어이! 좋은 외제 은단 없어?’ 하더란다. 세영 형은 딱 나만 한 키에 당시로선 획기적인 신형 007가방을 들고 다녔다.

79년 조영남씨가 방송국에서 즉석으로 그렸던 초상화. [사진 조영남]

79년 조영남씨가 방송국에서 즉석으로 그렸던 초상화. [사진 조영남]

조용호 형과는 재밌는 일이 제법 많았다. 용호 형은 나에게 은밀한 생활비법을 가르쳐주고 몸소 시범을 보인 형이다. “남자가 실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멋진 여자를 만날 수 있다.” 바로 그것이다. 용호 형 애인은 당시 내가 입을 떡 벌릴 만한 멋진 여자 아나운서였다.

용호 형이 라디오 PD에서 TV로 옮겨와 TBC에서 ‘쇼쇼쇼’라는 전설의 뮤직쇼의 PD를 맡게 됐을 때다. 건성이 아니다. 그때는 쇼쇼쇼 방송하는 날은(토요일이었던 것 같다) 길거리가 한산해질 정도였다.

급한 목소리로 형이 말했다. 내일 아침 신문에 내야 한다고 했다.

“야! 너 니 초상화 낼 아침까지 그려올 수 있어?”

내가 말했다. “그걸 뭘 낼까지 그려요. 지금 그리지”하며 테이블 위에 있던 빈 종이에 펜으로 쓱쓱 그려 형 앞에 내놓았다. 형은 물끄러미 보시더니 어이없다는 투로 “야! 내가 명색이 서울 미대 출신인데 그림은 음대인 니가 더 잘 그리는데!” 했다.

조용호 형보다 쇼쇼쇼에서 메인 PD였던 황정태 PD는 이백천 선생과 친한 친구 사이였다. 생각해 보시라. 이백천 선생과 조용호 형의 바로 윗급 PD였는데 무조건 날 썼으니 쇼쇼쇼에서의 조영남의 위상이 어떠했을지 말이다.

이백천 선생은 재미있어서 우리 모두와 가까운 분이 아니었다. 수많은 쎄시봉 어른들 중에 유독 우리들과 단연 마음이 통했던 분이시다. 그때 우리는 그냥 붙어살았다고 해야 옳은 표현이다. 선생은 10년 후, 20년 후에 봐도 매번 똑같은 모습이었다. 늘 젊은이와 함께 있었다. 쎄시봉이 경영 문제로 문을 닫으면 계속 이어서 ‘르시랑스’ ‘청개구리’ 등으로 젊은이들을 따라 옮기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백천 선생은 영원히 늙지 않는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모르겠다. 다른 친구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허나 나한테는 내 인생 전체에서 최초이자 최후로 결코 녹슬지 않는 스승으로 군림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유가 있다. 딴 얘기지만 나는 낼모레 5년여 만에 처음으로 ‘열린 음악회’에 나가 6곡의 노랠 불러야 한다. 나는 백천 선생의 가르침을 지금도 꼭 지켜야 한다고 속으로 다짐하고 있다. 백천 선생의 가르침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 내가 지금도 ‘열린 음악회’에 나갈 정도로 팔리는 것은 바로 백천 선생의 가르침 덕이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행여 노래를 잘 불렀다 싶으면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없다. “잘 했써어! 조았써어!”하며 양 손바닥을 위로 뻗어 올릴 때는 정말 귀여우셨다. 우리는 어른들께 ‘귀엽다’는 어휘를 잘 안 쓰는데 난 상관 안 한다. 미국 살 때 어느 날 나는 쭈그리고 앉아 잔디를 다듬고 있었다. 그런데 대여섯 살이나 됐을까 하는 미국 꼬마 녀석이 내 앞으로 오더니 내 앞 머리카락을 좌우로 툭툭 쓰다듬으며 “유 큐트!” 하는 것이다. 그 당시 몇 주 동안 미국 교회에서 노랠 불렀을 때다. 나는 “아니 요 라이터돌만 한 짜슥이!” 했는데 금방 참았다. 난 지금 미국 땅에 있는 것이다. 팁 하나를 선물하겠다. 외국 할머니들한테 “유 큐트!” 해봐라. 죽어 넘어간다.

이백천, 내가 지어준 ‘똘강’ 별명 좋아해

이백천 선생의 가르침은 사실 심플하고 간단했다. 내가 배운 건 두 가지다. 첫째는 좋은 가수가 되려면 노래할 때 너무 잘 부르려 들지 마라. 잘하려고 하면 욕심이 생겨 흐름이 흐트러지게 마련이다. 둘째는 니가 가지고 있는 기량의 70%만 사용하라. 나머지 30은 다음 공연을 위해 비축해둬야 한다. 신기했다. 이 가르침은 내 아버지 조승초씨가 나더러 맨날 해주었던 말씀이시다. “놀멘놀멘하라우.” 덤비지 말고 천천히 하라는 얘기다. 이백천 선생의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말라는 가르침과 일맥상통하는 얘기다. 오버하지 말라는 뜻이다. 힘 빼라는 뜻이다. 오죽하면 여북하랴. 78년에 쓴 자전적 소설의 제목이 바로 ‘놀멘놀멘’이었다. 결국은 절제가 최상이라는 조언인데 빌어먹을! 그 절제를 조절하지 못해 결국 이혼에 무슨 무슨 파동의 불명예를 지녔어야만 했다.

나는 백천 선생의 조언을 평생 지키려고 애를 썼고 실제로 써먹어 오늘에 이르렀다. 내가 백천 선생이 주신 가르침에 보답한 것이라고는 냇물을 뜻하는 백천의 ‘천(川)’자를 충청도 사투리로 바꿔 ‘똘강’이라는 별칭 혹은 애칭을 지어드린 것뿐이다. 지금도 우리 쎄시봉 친구들 사이에는 똘강으로 통한다. 똘강 선생은 『이백천의 음악여행』에서 “조영남이 장난삼아 지어준 ‘똘강’이라는 별명이 묘하게 좋았다”라고 썼다. 지금까지 나는 쎄시봉에서 만난 사람들로 문지기 용출이에서 피세영, 조용호, 이백천까지 썼다. 정작 평생 친했던 친구들인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 김세환을 깜빡 잊었다. 여기서 독자들은 질문이 나와야 한다. “그럼 쎄시봉에는 남자들만 있었느냐. 여자들은 없었느냐.” 좋은 질문이다. 있었다. 없을 리가 있나. 통상 여자들이 많아야 남자 손님들도 많은 법이다. 있었다. 성우 이장순, 여류 화가 비함과 이강자, 연세음대의 병아리 가수 최영희, 그리고 신인 탤런트 최화라, 그리고 한양대 1학년생이었던 윤여정이 있었다. 얼마 안 되어 윤여정은 사실상 쎄시봉 음악감상실의 여자 대표 격이었다.

나는 이백천 선생에게 짓궂은 ‘똘강’이란 예명을 지어주었듯이 윤여정한테도 ‘윤잠깐’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곤 했다. TV에 등장할 때 잠깐 나왔다가 금방 들어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형편이 많이 달라졌다. 싹 달라졌다는 표현도 형편없이 모자란다. 오늘날 우리 쎄시봉 친구들 전부가 ‘잠깐’을 못 벗어나는데 윤여정은 지금 아카데미 가까이까지 가고 있다. 말 그대로 헐! 이다. 윤여정이 33개 상에 오늘도 멈추지 않고 아카데미 쪽으로 가고 있는 동안 이 글을 쓰고 있는 2021년 12시 35분 강남구청을 찾아가 콧구멍을 쑤시는(아! 많이 아파 눈물이 났다) 코로나 검사를 마치고 자가격리자 판정을 받고 돌아왔다. 확진자 발생한 병원을 단지 방문했을 뿐인데 말이다. 난 지금 윤씨에 대해 가타부타할 자격조차 없는 몸이다. 이백천 선생이 쓴 『이백천의 음악여행』이란 책자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중략)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 윤여정, 최영희와 서울대 음대생이던 전혜숙과 이숙영 등이 함께 조영남이 살던 마을 근처 수덕사 중턱까지 갔다 내려오던 길이었다. 계단이 좁아 한 사람씩 길을 내려오는데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후미에서 일행을 따르던 내가 소리쳤다. ‘야! 우리 가까운 사람하고 손잡고 내려가자.’ 좁은 계단의 왼쪽은 낭떠러지였다. 앞서간 송창식은 이미 아래 평지로 내려와 서 있었다. 나는 곁에 있던 최영희와 손을 잡았고 조영남은 자연스레 윤여정과 손을 잡았다. 세 발짝이나 옮겼을까? ‘엄마’ 하는 비명 소리와 함께 윤여정이 위태롭게 조영남에게 매달렸다.”

(슝슝 독자들 짱돌 날라오는 소리. ‘집어쳐 이 시캬!’)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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