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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ITC “SK, LG 영업비밀 없었으면 개발 10년 걸렸을 것”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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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6호 14면

‘SK이노베이션이 LG에너지솔루션의 영업비밀을 침해하지 않고 제품을 독자 개발했다면 10년은 걸렸을 것이다’.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가 4일(현지시간) 두 회사의 소송전과 관련해 공개한 96쪽짜리 최종 의견서의 요지다. 조 바이든 행정부가 지난달 10일 나온 ITC의 최종 판결 리뷰를 진행하는 가운데 ITC가 LG에너지솔루션을 손을 들어준 근거를 조목조목 제시한 것이다.

‘배터리 소송’ 최종 의견서 공개 #LG “영업비밀 침해 명백히 입증” #SK “실체적 검증 없이 심리해 유감” #LG 2조~3조, SK 5000억~6000억 #합의금 입장차 크지만 절충 가능성도

의견서에서는 SK이노베이션의 문서 삭제 행위와 이것이 정기적 관행이라는 변명, 그리고 문서 삭제 행위의 은폐 시도가 ‘노골적 악의(flagrant bad faith)’에 따른 것이라고 명시했다. 더구나 고위층이 지시해 증거 은폐 시도가 전사적으로 진행됐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LG에너지솔루션이 침해당했다고 제출한 11개 카테고리의 22개 영업비밀을 법적 구제 명령의 대상으로 판단했다. 11개 카테고리는 전체 공정, 원자재부품명세서 정보, 지그 포메이션(배터리 셀 활성화 관련 자료) 등이다.

특허 침해 소송은 11월 최종 판결

두 기업의 소송전은 2019년 4월에 LG에너지솔루션이 분리 전인 LG화학이 SK이노베이션으로부터 영업비밀을 침해당했다며 ITC와 미 연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면서 불이 붙었다. 이후 SK이노베이션이 LG화학으로부터 일부 특허를 침해당했다며 제소해 맞불을 놓자, LG화학 역시 특허를 침해한 쪽은 SK이노베이션이라며 맞소송을 제기했다. 영업비밀 침해 소송은 이미 결론이 났고, 특허 침해 소송전의 최종 판결은 11월 말에 나올 예정이다. 특허는 기술의 ‘공개’를 전제로 일정 심사 과정을 거쳐 출원 후 보유자가 일정 기간 독점·배타적인 사용 권리를 가진다는 점에서 영업비밀(‘비공개’를 전제로 보유자가 영구적으로 사용하되 권리 범위는 불명확)과 다르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영업비밀 침해 관련 소송전의 발화점은 두 기업이 2018년 9~10월 독일 폴크스바겐을 두고 벌인 배터리 수주 경쟁이었다. ITC는 당시 SK이노베이션이 영업비밀에 해당하는 LG화학의 경쟁 가격 정보를 취득해 폴크스바겐에 자사 배터리를 LG쪽보다 낮은 가격에 납품하겠다고 제안해 수주했다고 인정했다.

ITC가 최종 의견서까지 공개했지만 두 회사의 입장 차이는 여전하다. 합의를 하더라도 거액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LG에너지솔루션 관계자는 “개발과 생산, 판매 등 배터리 사업의 모든 영역에 걸친 (SK이노베이션의) 영업비밀 침해 사실이 명백히 입증됐다”고 말했다. 이와 달리 SK이노베이션 측은 5일 입장문을 내고 “두 회사의 배터리 개발·제조 방식이 달라 LG에너지솔루션의 영업비밀 자체가 필요 없다”면서 “우리는 1982년부터 약 40년간 독자 개발했으며 이미 2011년 글로벌 자동차 제조사와 공급 계약을 했는데 ITC가 실체적 검증 없이 (문서 삭제 등) 소송의 절차적 흠결을 근거로 심리해 유감”이라고 반박했다. 구체적으로는 “영업비밀 침해라고 결정하면서도 여전히 침해됐다는 영업비밀이 무엇인지, 어떻게 침해됐다는 것인지 판단하지 못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그러면서 “LG는 침해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고, ITC 의견서 어디에도 이번 사안의 본질인 영업비밀 침해에 대한 증거는 드러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법무법인 로베이스의 김정민 변호사는 “ITC가 당초 업계 예상보다 많은 22개의 영업비밀 침해를 인정했다”며 “SK이노베이션의 영업비밀 침해가 그만큼 심각하다고 봤다는 의미”라고 분석했다. 김 변호사는 “수입 금지(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생산용 물품 미국 내 반입) 10년 조치는 두 기업 간 기술 격차가 그만큼 크다고 본 것인데, 삭제 자료에 대한 ITC의 복구 명령을 SK이노베이션이 잘 따르지 않은 게 (판정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며 “SK이노베이션의 자료가 부족하면 ITC로선 LG에너지솔루션 자료를 더 많이 참고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중국 경쟁사의 질주, 국익 등의 배경에 따라 두 회사가 합의 가능성은 열어두고 있다. 그러나 합의금 액수 차이가 크다. 업계에 따르면 LG에너지솔루션은 합의금으로 2조~3조원을, SK이노베이션은 5000억~6000억원을 고려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5일 온라인 기자간담회에서 “SK이노베이션이 ITC의 최종 결정을 수용하고 진정성 있게 협상에 나선다면 합의금은 유연하게 정할 수 있다”며 여지를 남겼다. 재계 관계자는 “글로벌 전기차 배터리 시장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는 데다, 소송 장기화로 두 회사의 비용 부담도 크다”며 “시간은 좀 걸리더라도 결국 양측이 합의금 규모를 절충해 합의할 확률이 높다”고 내다봤다. 다만 한웅재 LG에너지솔루션 법무실장은 “합의가 되지 않으면 원칙대로 간다”면서 미국에 있는 징벌적 손해배상제 활용 등 ITC 판정을 넘는 불이익이 따를 수 있다고 경고했다.

SK, 공탁금 걸고 사업 계속 하는 방안 검토

SK 측은 당장은 합의에 소극적인 분위기다. 조 바이든 대통령의 수입 금지 조치 거부권 행사에 기대를 걸고 있다. ITC 판결은 조 바이든 대통령이 검토(Presidential Review)를 거쳐 승인하면 확정된다. SK는 ‘ITC의 결정에서 침해됐다는 영업비밀이 무엇인지, 어떻게 침해됐다는 것인지에 대한 판단이 나오지 않았다’는 점을 내세운 의견서를 백악관에 전달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ITC 최종 결정 후 60일 이내에 거부권 행사 여부를 결정한다. SK 측은 또 수입 금지 결정을 받는 물품에 대해선 합의를 위한 공탁금을 법원에 내고 일시적으로 효력을 정지시켜 사업을 계속 하는 방안도 검토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창균 기자 smi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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