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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영은의 야·생·화] 파문 커진 '학폭' 논란, 엄중하되 신중해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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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영은의 야野·생生·화話]

프로배구를 뜨겁게 달군 '학폭(학교폭력)'의 파문이 프로야구로 번지는 모양새다. 한화 이글스 소속 A 선수와 초등학교를 함께 다녔다는 네티즌 B씨가 19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폭로 글을 올렸다. A 선수의 초등학교 졸업사진과 실명을 공개했고, 일부 피해 사례를 나열했다. "청소 도구함에 나를 가둔 채 협박했다"는 충격적인 내용도 포함돼 있었지만, B 씨는 얼마 뒤 "어린 시절 기억이라 그 사건 때 A가 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글을 수정했다. 다만 "평소 나를 괴롭히던 무리 중에 A가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적었다.

'학폭'은 최근 체육계에서 가장 민감하고 뜨거운 이슈다. 여자 프로배구의 스타 쌍둥이 자매 이재영과 이다영(이상 25·흥국생명)이 과거 함께 운동했던 피해자의 학폭 폭로로 무기한 출전 정지 중징계를 받았다. 이들은 앞으로 태극마크를 달고 국제대회에 출전할 수 없다. 남자 프로배구 송명근(28)과 심경섭(30·이상 OK금융그룹)도 같은 이유로 남은 시즌 출장을 포기했다.

또래 사이의 폭력만 문제가 된 것도 아니다. 이상열 KB손해보험 감독은 2009년 국가대표팀에서 박철우를 구타했던 사건을 다시 언급했다가 피해자의 분노를 자극했다. "이후에도 폭력적 성향이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는 추가 폭로가 나오자 이 감독도 스스로 잔여 시즌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스타급 배구인들이 연루된 일만 해도 이 정도이니, 얼마나 더 많은 선수가 학폭과 체벌 속에 고통받으며 운동했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나마 다행인 건, '폭력'에 대한 구단들의 인식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거다. 과거엔 "다들 맞으면서 운동했다", "팀 기강을 잡기 위해 꼭 필요했다"는 이유를 들어 사태의 심각성을 축소하는 데 급급했다. 요즘은 "폭력은 어떤 핑계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게 상식이다. 일단 팬들이 '때리는 선수'를 용서하지 않는다. 학폭 폭로가 꼬리를 물고 이어질 때마다 "징계 수위를 더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다만 가해자에게 엄벌을 내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다. 인터넷과 모바일에 올라오는 폭로 글의 진위를 빈틈없이 확인하는 거다. 가해자가 스스로 학폭 사실을 인정했거나, 명백한 증거 혹은 증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더욱 그렇다. 앞서 프로배구의 학폭 폭로가 이어지는 과정에서도 이미 애꿎은 선수가 가해자로 잘못 지목돼 마음고생을 했다. 학폭의 위험성을 일깨우려다가 또 한 명의 '억울한 희생자'를 만드는 부작용은 피해야 한다는 의미다.

A 선수의 학폭 논란에 대처하는 한화 구단의 절차는 그 모범답안이 될 수 있다. 한화는 19일 밤 10시쯤 B 씨의 글을 확인한 뒤 곧바로 A 선수를 면담했다. A 선수는 B 씨 이름과 사진을 보고 "누군지 전혀 모르는 분이다. (폭로 글에 언급한 일들도) 전혀 기억에 없다"고 부인했다. A 선수와 같은 초등학교를 나온 동기생 동료 C 선수도 "나 역시 잘 기억나지 않는 친구다. A와는 같은 야구부라 쉬는 시간을 포함해 거의 모든 시간을 함께했는데, 누군가를 괴롭히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한화는 20일 오전 단장을 비롯한 유관 부서 팀장과 실무자들을 비상 소집했다. 구단의 확실한 대응 방침을 정하기 위해서다. 일단 김장백 운영팀장이 B 씨에게 직접 연락해 자세한 상황을 문의했다. 이어 A 선수와 B 씨의 학창시절 교사, B씨가 직접 "과거 일을 증언해줄 수 있다"고 지목한 지인 등과 두루 통화해 사실관계를 파악했다. 그 결과 A 선수의 학폭 가담 장면을 명확히 기억하는 이가 아무도 없음을 확인했다.

한화는 결국 21일 "여러 루트를 통해 최대한 객관적인 판단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A 선수가 아닌 B 씨의 지인들에게도 사실 여부를 뒷받침할 만한 판단 근거를 얻지 못했다. 당사자들 간의 기억이 명확히 다른 점, 무엇보다 확실한 근거가 될 수 있는 학폭위 개최 기록이 없는 점 등을 고려해 안타깝지만 구단의 권한 범위 내에선 더 이상 사실관계 입증이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발표했다.

한화는 이어 "구단은 학폭 문제를 사회적으로 중차대한 사안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피해를 주장하시는 분의 일관적인 입장 역시 존중한다"면서도 "A 선수 역시 '결백을 증명하고 싶다'는 일관된 희망을 밝히고 있다. 또 '최종적으로 법적 대응까지 염두에 두고 실추된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전해왔다. 따라서 구단은 모든 절차가 마무리될 때까지 판단을 유보하고 결과를 기다리겠다"고 설명했다. "사실일 경우 구단의 '무관용 원칙'에 따라 엄중한 조치를 취할 것이고, 사실이 아닐 경우 구단 차원에서도 향후 대응을 검토하겠다"는 얘기다.

야구팀장 bae.younge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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