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盧의 '클릭 한번'이 결정타였다···NLL 회의록 판결 막전막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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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7년 10월 4일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남북공동선언문에 서명한 후 악수하고 있다. [중앙포토]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7년 10월 4일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남북공동선언문에 서명한 후 악수하고 있다. [중앙포토]

NLL 포기 발언 의혹에서 사초(史草) 실종 논란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이 경쟁한 18대 대선을 뜨겁게 달궜던 논란이 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서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을 했다는 의혹이었습니다. 사실이라면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자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장이던 문 대통령에게도 치명타가 될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남북정상회담 수행단이 “NLL 포기 발언은 없었다”고 말했지만 의혹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판다-판결 다시보기

박 전 대통령 당선 후인 2013년 6월 국정원은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발췌본을 공개하며 “노 전 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을 확인했다”고 밝혔습니다. 문 대통령은 그러자 “회의록 전문을 공개하자”고 맞섰죠. 공개된 전문에서 직접 ‘포기’ 발언을 한 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으로 밝혀졌지만, 논란은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 새누리당은 “NLL 포기 발언의 실체가 드러났다”고 봤고, 민주당은 “설득하기 위한 노력을 왜곡했다”고 맞섰습니다.

회의록 중 일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지금 서해 문제가 복잡하게 제기되어 있는 이상에는 양측이 용단을 내려서 그 옛날 선들 다 포기한다. 평화지대를 선포, 선언한다. 그러고 해주까지 포함된 육지는 제외하고, 이렇게 하게 되면 이건 우리 구상이고 어디까지나, 이걸 해당 관계부처들에서 연구하고 협상하기로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해 평화협력지대를 설치하기로 하고 그것을 가지고 평화 문제, 공동번영의 문제를 다 일거에 해결하기로 합의하고 거기에 필요한 실무 협의 계속해 나가면 내가 임기 동안에 NLL 문제는 다 치유가 됩니다. NLL보다 더 강력한 것입니다.”

김 국방위원장 “이걸로 결정된 게 아니라 구상이라서 가까운 시일 내 협의하기로 한다. 그러면 남쪽 사람들은 좋아할 것 같습니까?”

결국 원본을 확인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됐는데, 여기서 반전이 벌어집니다. 국가기록원에 회의록 원본이 없었던 겁니다. 새누리당은 문 대통령을 비롯한 노무현 정부 관계자들이 회의록 원본을 고의로 폐기‧은닉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검찰에 고발했습니다.

검찰 “노 전 대통령 지시로 회의록 원본 폐기”

이진한 당시 서울중앙지검 2차장검사가 2013년 서울 서초동 고등검찰청 기자실에서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폐기의혹 관련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뉴스1]

이진한 당시 서울중앙지검 2차장검사가 2013년 서울 서초동 고등검찰청 기자실에서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폐기의혹 관련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뉴스1]

4개월 동안 20여명의 관련자 소환 조사와 압수수색을 거친 검찰은 2013년 11월 “회의록 원본이 국가기록원으로 이관되지 않은 건 노 전 대통령의 지시 때문이었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조명균 전 안보정책비서관은 98쪽짜리 회의록 초본을 청와대 이지원시스템에 올렸습니다. 노 전 대통령은 이 문서를 본 뒤 ‘열람’ 상태로 처리하면서 “회의록 내용 중 정확하지 않은 부분은 수정하고, 오해가 발생할 수 있는 부분은 각주를 달아 완성도를 높이라”며 재검토 의견을 남겼습니다. 조 전 비서관은 이에 따라 103쪽짜리 완성본을 다시 만들었고, 이는 국정원에 1급 비밀 형태로 보관됐습니다.

노 전 대통령은 이지원시스템에 있는 회의록 파일은 없애라고 지시했고, 이에 따라 백종천 전 청와대 외교안보실장과 조 전 비서관이 파일을 삭제했다는 게 검찰의 시각입니다. 두 사람은 대통령기록물 관리법 위반 등 혐의로 불구속기소 됐습니다. 다만 문 대통령 등 다른 인물들에 대해서는 “삭제 또는 유출에 관여했음을 인정할 직접적인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며 사법처리 대상에서 제외했습니다. 판결문에 담긴 공소사실에서 검찰은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전후해 국내 정치적‧사회적으로 NLL 재설정, 양보 여부가 크게 논란이 되는 상황에서 노 전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이 대통령기록관으로 이관되어 역사적 기록물로 보존되는 것을 막고자 했다”고 밝혔습니다.

1‧2심 “초본은 대통령기록물 아니다”

문재인 당시 민주당 의원(가운데)이 2013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노무현재단 주최로 열린 10·4 남북 정상선언 6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문 의원은 이날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은 있고,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은 없었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문재인 당시 민주당 의원(가운데)이 2013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노무현재단 주최로 열린 10·4 남북 정상선언 6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문 의원은 이날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은 있고,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은 없었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재판의 쟁점은 노 전 대통령이 NLL 포기 발언을 했는지, 그래서 초본을 삭제하라고 한 건지 등 정치적 논란과는 달랐습니다. 회의록 초본을 대통령기록물로 볼 수 있는지, 그래서 이를 삭제한 게 대통령기록물 관리법 위반으로 볼 수 있는 지였습니다.

법원은 결재권자의 ‘결재’가 이루어졌을 때 비로소 대통령기록물로 ‘생산’된다고 봤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결재라고 봐야 할까요. 1‧2심 재판부는 “결재권자가 자신에게 보고된 문서관리카드의 내용을 승인해 이를 공문서로 성립시킨다는 ‘의사’에 기초해 전자문서서명 등을 하는 행위”라고 정의했습니다. 즉, 대통령이 초안을 대통령기록물로 만들겠다는 의도를 갖고 서명했을 때 결재로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노 전 대통령의 ‘재검토’가 중요해집니다. 1‧2심은 그가 ‘열람’을 누른 건 초본의 내용을 승인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작성자에게 반환하면서 그 내용을 재검토해 수정하도록 지시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초본은 대통령기록물로 생산되지 않았고, 대통령기록물을 무단으로 폐기했다는 혐의에도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소부→전원합의체→다시 소부…다사다난했던 5년

2015년 대법원으로 넘어온 사건은 지난 10일 결과가 나오기까지 5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처음 대법원 2부에 배당됐던 사건은 이후 전원합의체로 넘겨집니다. 대법원 2부에 소속된 4명 대법관의 의견 일치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소부에서는 대법관 전원의 의견이 일치해야 하지만 전합의 결정은 대법관 3분의 2 이상의 출석과 과반수의 찬성으로 의결됩니다.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면 반대의견으로 판결문에 자기 생각을 남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전합에서 심리가 진행된 후 사건은 다시 대법원 2부로 돌아왔습니다. 대법원 관계자는 “전합에서 논의를 하다 보면 생각이 달랐던 4명의 대법관의 의견이 일치되는 경우가 있다”며 “굳이 전합에서 선고할 필요가 없으니 다시 소부로 돌아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말했습니다. A와 A‛를 놓고 싸웠는데, B를 주장하는 사람을 만나고 보니 ‘우리가 사실은 같은 생각이었구나’ 깨닫게 되는 셈입니다.

왜 하필 ‘열람’인가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폐기를 공모한 혐의로 기소된 백종천 전 청와대 외교안보실장(오른쪽)과 조명균 전 청와대 안보정책비서관이 2015년 6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뒤 법원 건물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폐기를 공모한 혐의로 기소된 백종천 전 청와대 외교안보실장(오른쪽)과 조명균 전 청와대 안보정책비서관이 2015년 6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뒤 법원 건물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가까스로 대법원 2부(주심 박상옥 대법관)로 돌아온 사건은 무죄였던 원심을 깨고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 됐습니다.

대법 역시 대통령기록물이 되기 위해서는 문서의 내용을 승인해 성립시킨다는 의사를 갖고 결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봤습니다. 하지만 ‘재검토’ 지시에 대해 대법은 다른 판단을 내렸습니다. 노 전 대통령이 재검토를 지시한 건 “이 회의록 내용을 열람했고, 확인했다”는 뜻이니 그에게는 회의록 초안을 공문서로 만들겠다는 의사가 있었다는 겁니다.

노 전 대통령이 ‘열람’ 항목을 누른 것을 근거로 삼았습니다. 만약 노 전 대통령이 ‘반환’ 명령을 선택했다면 전자문자서명 생성 없이 반려할 수 있음에도 ‘문서처리’ 및 ‘열람’ 명령을 선택해 서명이 만들어지도록 한 건 ‘결재’를 한 것이고, 회의록 초안은 대통령기록물로 생성됐다는 겁니다.

이에 따라 두 사람이 이지원시스템에서 초안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정보를 삭제했다면 대통령기록물 파기에 해당한다고 판단했습니다. 또 이는 공용전자기록 손상죄에도 해당한다고 봤습니다. 사건은 서울고법에서 다시 다뤄질 예정입니다. 대법원 판단의 기초가 된 사실관계에 새로운 증거 등 변동이 없는 한 기속력이 생기기에 파기환송심은 대법원 판결 내용대로 판단해야 합니다.

이가영 기자 lee.gayoung1@joongna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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