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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윤영관의 한반도평화워치

원칙은 소국의 방패…명분의 힘으로 국익 보호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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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미·중 경쟁 속 한국 생존법

한반도평화워치 12/8

한반도평화워치 12/8

2003년 아세안+3 외교장관 회의에 참석했었다. 당시 여러 현안이 있었지만 17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자야쿠마 싱가포르 외교장관의 두드러진 역할이었다. 당시 9년째 외교장관을 하고 있던 그는 도시 국가 싱가포르의 대표로 아세안 10개국 좌장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는 회의 도중 휴식 시간에 잠깐 이야기 좀 하자고 내게 청했다. 회의장 창가에 서서 15분 정도 대화를 나누었다. 요점은 중국과 일본은 아세안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서로 경쟁적으로 진출하고 있는데 한국은 통 보이지를 않으니 어떻게 된 거냐는 것이었다. 경청할 메시지라 생각했다. 귀국 후 대통령께 한-싱가포르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서둘러 체결하고 아세안에 적극적으로 진출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했다. 한국의 본격적 아세안 진출의 시발점이었던 것 같다.

싱가포르는 미·중을 원칙 외교로 상대하며 친한 이웃 많이 만들어 #소국의식에 움츠러들면 상대국은 우습게 보고 국민은 자긍심 잃어 #우리 외교 원칙은 주권 존중과 민주주의·다자주의·시장경제·개방성 #바이든 민주주의 외교 동참하되 미·중 경쟁서 한반도 문제 분리 노력

우리는 국력의 크기를 크게 의식한다. 소국의식·피해의식에 사로잡혀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며 한탄한다. 세계 10위 경제력을 가진 지금도 그렇다. 물론 국력은 중요하다. 그러나 힘은 쓰기 나름이다. 대국이지만 그 힘을 잘못 써서 쇠망하고, 소국이지만 작은 힘의 규모보다 훨씬 큰 역할을 하는 나라도 있다.

모든 국가를 친구로 만드는 싱가포르

인구 500만의 싱가포르가 그렇다. 그들은 체념하지 않았다. 오히려 국제 정치의 변화 상황을 면밀히 꿰뚫어 보고 그 속에서 최선의 활로를 찾았다.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리콴유 총리가 싱가포르 외교의 초석을 깔았다.

싱가포르는 미국과의 안보 협력을 중시한다. 미국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개입해 지역 평화에 기여했다며 적극 지지한다. 무기를 미국에서 구매하고, 자국 군대의 훈련을 미국과 함께한다. 그런데 싱가포르는 중국과도 ‘전면적 협력동반자’로 우호 관계를 맺고 있다. 세 개의 정부 간 경제 협력 프로젝트도 추진하고 있다. 이처럼 대국들을 상대하는 작은 나라 싱가포르의 위상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 아세안 외교다. 아세안의 대외적 입장이나 내부 현안들을 논의할 때 방향을 제시하는 리더십을 발휘한다. 더하여 호주·인도·일본과도 긴밀하게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한마디로 작은 나라이기에 모든 국가를 친구로 만드는 전방위 외교를 하고 있다.

이러한 외교를 하면서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들이 세운 ‘원칙’에 충실하다는 것이다.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는 지난해 8월 언론 기고에서 중국계 시민이 대다수(74%)인 점이 중국과 일할 때 어려움을 주기도 한다고 말했다. 중국과 전통·조상·언어를 공유하는 국가인 싱가포르가 왜 자기네들과 시각을 공유하지 않느냐고 중국 측이 말한다는 것이다. 그는 그런 말이 나올 때마다 “어떤 이슈가 되었든 우리의 견해와 행동은 언제나 감정이 아니라 원칙(principle)에 기반을 둔다”라고 분명히 말했다고 한다. 실제 1994년 마이클 훼이라는 미국 청년이 위법 행위로 싱가포르 법정에서 태형을 선고받았다. 그때 미국 클린턴 행정부는 강한 항의와 압력을 행사했지만, 싱가포르 당국은 단호히 거부했다. 법원의 결정을 존중해야 하며 이것은 주권 문제라는 것이었다.

‘원칙’은 소국이 자국을 스스로 방어하는 수단이다. 명분이라는 방패로, 힘을 가진 상대가 이쪽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면서 집요하게 상대의 허점을 파고들어야 한다. 다윗은 골리앗이 원하는 맞붙어 싸우기 근접전이 아니라 멀리서 돌멩이를 날리는 원격전으로 힘센 골리앗을 쓰러뜨렸다. 『다윗과 골리앗』의 저자 말콤 글래드웰의 해석이다.

미·중 대결이 치열해지면서 한국의 고민도 커지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서도 미·중 대결은 지속할 것이다. 미국은 미국대로, 중국은 중국대로 한국을 압박해올 것이다. 이 상황에서 자신을 보호할 방도는 싱가포르처럼 나름대로 외교의 ‘원칙’을 정하고 그것을 충실하게 실행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원칙’을 공유하는 우군을 도처에 만들어두는 일이다. ‘원칙’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면 상대국은 더욱 우습게 보고, 국민은 자긍심을 잃는다.

대륙·해양 세력 부딪칠 때 한반도 수난

우리가 외교의 ‘원칙’으로 삼아야 할 것은 무엇보다 주권 존중이다. 한국의 국가 정체성인 민주주의·다자주의·시장경제·개방성·투명성 등의 가치도 중요하다. 이러한 ‘원칙’을 지켜나가는 게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6·25전쟁에 대해 “항미원조전쟁은 제국주의 침략을 억제한 것”이라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발언을 한국 국방장관과 외교장관이 뒤늦게나마 반박한 것은 잘한 일이다.

바이든 행정부에 대해서는 국가 정체성이라는 ‘원칙’ 차원에서 그들의 민주주의 동맹 외교에 동참할 필요가 있다. 다만 그들의 협조를 구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수성이다. 한반도에서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이 직접 부딪칠 때마다 엄청난 수난을 겪어온 것이 우리 역사다. 임진왜란, 청일전쟁, 식민지화, 분단, 6·25 등 그런 사례가 차고 넘친다.

그러한 특수성을 고려해 한·미 동맹의 타깃을 중국으로까지 확대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런 지정학적 고민도, 북한 문제도 없는 일본·호주와 똑같은 동맹국 범주에 한국을 넣지 말고 차별화된 동맹 범주에 넣어달라는 것이다. 대신 중국에는 민주주의라는 국가 정체성에 따라 외교를 해나가는 것이 우리 외교의 ‘원칙’이라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해서 미·중 경쟁의 맥락에서 최대한 한반도 문제를 분리해내야 한다. 그래야 한반도 평화가 가능해진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고, 뜻이 없으면 있는 길도 안 보인다.

미국, 동맹국 정치 상황·특수 요인 고려해 안보 협력 추구한다

조 바이든 행정부의 국방장관 후보자로 꼽히는 미셸 플루노이는 지난 6월 포린어페어스에 글을 기고했다. 그는 기고문에서 미국이 동맹국이나 파트너들과 안보 협력을 추구할 때 그 국가들이 각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지 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이 원하는 것만 일방적으로 밀어붙여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마크 에스퍼 전 국방장관이 2018년 육군장관 때 지시해 올 7월 나온 미국 육군대학원의 보고서 ‘전환된 군대’(An Army Transformed)도 비슷하다. 이 보고서는 향후 미군의 인도·태평양 지역 주둔 태세를 재검토하는 밑그림으로 볼 수 있다. 거기서도 미국과의 안보 협력의 범위와 정도는 각국의 국내 정치와 각자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고 보고 있다.

미국이 가장 중요시하는 6개 동맹 및 협력국(일본·호주·한국·대만·필리핀·싱가포르)을 지목하는데 그중 가장 먼저 일본·호주와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통합 작전 네트워크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에 대해서는 한반도의 안정적 관리에 집중하고 있고 중국에 근접해 있다는 점, 한·일 관계 등을 고려할 때 중국에 대응하는 안보 협력이 단기적으로는 제한적일 것이라고 평가한다. 이처럼 미국은 안보 협력과 관련해서 동맹 상대국들의 국내 정치적 상황이나 특수 요인들을 충분히 고려해 차별화하려 한다.

그런데 정작 한국 쪽의 일부 여론 주도층은 미국의 요구를 그대로 들어주지 않으면 마치 한·미 동맹이 끝날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혹시라도 국내 정치의 진영 논리에 따라 외교 문제를 뒤틀어 해석한다면 그것은 위험하다. 우리 외교의 자율 공간이 사라져버리거나, 비현실적이 되어버릴 수 있다.

한·미 동맹은 중요하다. 우리의 국가 이익을 받쳐주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인의식을 갖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은 미·중 신냉전의 최전방 기지가 되어버리고 한반도 평화는 멀어질 것이다. 미국이 중거리미사일을 한국에 배치하겠다면 덥석 받을 것인가? 우리에게 지정학적 딜레마를 해소할 적극적 의지가 있다면 동맹 속에서 그 길이 보인다.

윤영관 서울대 명예교수·전 외교통상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