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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임재준의 의학노트

백신, 음모론, 전문가의 역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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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임재준 서울대 의대교수 의학교육실장

임재준 서울대 의대교수 의학교육실장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의학에도 첨단 기법이 속속 도입되고 있다. 표적 항암제, 로봇 수술, 중입자 치료, 의료 인공지능 같은 것들이다. 그렇지만 이 중 어느 것도 백신만큼 인류에게 기여하지는 못할 것이다. 백신 덕분에 천연두는 박멸되었고, 폴리오바이러스 감염도 거의 없어졌다. 그럼에도 백신의 부작용에 대한 시비가 자주 일고 있다. 흔히 MMR 이라고 불리는 홍역·볼거리·풍진 혼합백신에 대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인류에 대한 백신 기여 큰데 #부작용 크다는 음모론도 기승 #불확실성 속 바른 판단하려면 #전문가들 의견에 귀 기울여야

1998년 2월, MMR 백신에 관한 충격적인 내용의 연구가 최고 의학학술지 중 하나인 ‘랜싯’에 게재됐다. 앤드루 웨이크필드 교수가 이끄는 영국 왕립자유병원 및 의과대학 연구팀은 자폐증 등의 발달 장애와 함께 복통과 설사로 고생해온 아이들 12명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주된 내용은 대장내시경을 통해 이 아이들의 장 점막에서 특이한 염증을 확인했다는 것이었다. 장 점막의 염증 때문에 펩타이드가 지나치게 많이 흡수되는 것이 발달 장애의 원인일 수 있다는 주장은 과거에도 있었으므로 그리 새로울 것이 없는 연구였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이 아이들의 발달 장애는 대부분 MMR 접종 후 얼마 되지 않아 시작되었다고 밝히며, 둘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언급해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듬해 6월, 같은 대학 브렌트 테일러 교수는 이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연구 결과를 역시 ‘랜싯’에 발표한다. 연구팀은 1979년 이후 런던의 8개 지역에서 진단된 498명의 자폐증 및 아스퍼거 증후군 환자들의 진단 시기를 면밀히 분석했다. 테일러 교수는 환자 수가 꾸준히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MMR 백신이 전면적으로 도입된 후에 눈에 띄게 더 늘지는 않았다는 점과 접종 시기와 자폐증 진단 시점 사이에 연관이 없었다는 점을 근거로 둘 사이의 인과관계는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이후 웨이크필드 교수와 테일러 교수는 ‘랜싯’의 지면을 통해 가시 돋친 설전을 주고받기도 했다.

결국 2002년, 덴마크 연구팀이 1991년부터 1998년 사이에 태어난 덴마크 국민 전체를 분석하여 MMR 접종과 자폐증 발생은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결론을 내놓아 논쟁은 마무리되었다.

의학노트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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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웨이크필드 교수가 MMR 백신 생산회사를 고소한 부모들을 대리하던 변호사로부터 상당액의 연구비를 비공식적으로 받았다는 사실이 보도되어 연구 결과의 신빙성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결국 2007년 영국의료협의회는 논문에 대한 공식조사에 착수했는데, 몇 가지 예상하지 못했던 사실들이 드러났다. 연구팀은 논문에 밝힌 것과는 달리 자신들의 결론에 맞는 아이들만을 연구에 포함했고, 아이들에게 굳이 필요하지 않았던 대장내시경과 척수천자를 시행했으며, 연구윤리 심의위원회의 승인을 제대로 받지 않고 연구를 진행했던 것이 밝혀졌다.

결국 웨이크필드 교수의 의사면허는 취소되었고, 2010년 ‘랜싯’은 공식적으로 논문을 철회했다. 그렇지만 이 논문의 영향으로 백신 반대론이 한때 크게 힘을 받아 영국은 물론, 아일랜드·미국의 MMR 접종률은 한동안 눈에 띄게 줄었다. 이 영향으로 아일랜드는 300명 이상의 홍역 집단 발병을 겪기도 했다.

백신 반대론의 역사는 백신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최초로 개발된 천연두 백신도 자리 잡는데 애를 먹었다. 디프테리아·파상풍·백일해를 예방하는 DTP 백신도 거짓 정보를 담은 TV 프로그램에 영향받은 부모들의 반대에 부딪혀 한동안 필수 백신 목록에서 빠지기도 했다. 백신 반대론자들의 논리는 간단하다. 백신은 효과보다 부작용이 훨씬 큰데, 백신 제조회사를 비호하는 정부가 이를 은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음모론에 솔깃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자판을 잠깐만 두드리면 누구나 거의 모든 것에 관한 수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시대다. 그렇지만 넘쳐나는 정보 중 옥석을 가려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 분야에서 오랜 기간 훈련받은 전문가가 아니라면 충격적이지만 예외적인 사건에 휘둘려 잘못된 판단을 내리기에 십상이다. 음모론은 이를 파고든다. 복잡하고 불확실한 상황일수록 전체를 조망할 수 있도록 교육받은 전문가를 신뢰하는 것이 정답이다. 그것이 전문가의 존재 이유다. 물론 전문가들도 자신의 이해관계나 정치적인 입장을 떠나 불편부당한 의견을 내놓아야 한다는 점을 꼭 명심해야 한다.

임재준 서울대 의대 교수·의학교육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