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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특별기고

비현실적 상속세, 공론에 부쳐 대안 모색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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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정의화 전 국회의장

정의화 전 국회의장

한국 경제계의 ‘거인’이 떠났다. 오늘의 대한민국 국격을 드높여준 이건희 삼성 회장이 타계했다. 삼가 조의를 표한다.

상속세율, 시대 변화를 반영 못 해 #글로벌 기준에 맞게 30%로 낮춰야

한국 경제의 오늘을 그가 만든 삼성이 이끌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후발주자가 성공하려면 모든 것을 바꿔야 한다는 혁신 마인드는 영원히 남을 것이다.

이 회장의 사망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징벌적 상속세율이 회자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 국가 중 한국보다 상속세 세율이 높은 나라는 일본 정도에 불과하다.

과거엔 압축성장 과정에서 기업들은 사회적 책임을 소홀히 했고, 기업주가 사회 공헌에 인색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를 맞으며 기업문화는 이미 큰 변화를 겪었고, 경제 정의에 대한 국민 인식도 상당한 수준으로 높아졌다. 그런데도 국세에서 중요한 비중을 상속세와 양도소득세가 차지하는 세입 구조 탓에 재정 당국은 세율 인하에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국가의 경계가 허물어져 가는 21세기 세계 경제 상황을 고려할 때 이제는 극단적으로 높은 상속세율에 대해 국민적 토론이 필요하다.

과도한 상속세의 폐해는 필자가 생생하게 겪었다. 1974년 11월 2일 밤 서울 청량리에 있던 대왕코너 복합상가에서 발생한 대형 화재 참사로 88명이 사망했다. 필자의 장인어른이신 김원묵 부산 봉생병원 원장께서 화마로 봉변을 당하셨다. 고인은 당시 3억여원의 재산을 남겼는데, 믿기 힘들겠지만 95%의 상속세가 부과됐다. 당시에는 상속 재산이 1억 원 이상인 경우 세율이 90%였고 방위세 5%까지 추가된 결과였다.

물론 세원 관리가 부실하고 불법과 편법이 판치던 시절이라 세금 탈루와 불법이 많을 것이란 전제에 따라 당시엔 강력한 조세제도가 필요했을 것이다.

2000년대 중반 국회 재경위 위원으로 활동할 때 봉급생활자들을 ‘유리알 지갑’이라고 불렀지만, 당시 세원 노출은 80% 수준이었다. 자영업자의 경우 50% 정도라고 세무 당국이 보고했다.

지금은 어떠한가. 커피 한잔부터 대중교통 요금까지 거의 모든 소비 과정에서 신용카드 또는 전자화폐를 이용한다. 일반 국민의 경우 소득과 지출이 투명하게 공개되고, 기업의 경우도 이제는 세금 탈루를 생각하기도 힘든 시대다.

20년, 40년 전보다 조세 환경이 완전히 달라졌는데 왜 조세정책은 그대로인가. 20~30년 전에 만든 현행 상속세율과 단계별 과표 구간 액수를 경제 성장 누계치나 물가상승률만큼 상향 조정해야 하는 것이 상식 아닌가. 이제 세율도 글로벌 스탠더드로 가야 한다. 국회 재경위원장을 역임한 필자가 보기에 글로벌 스탠더드로  가려면  상속세율을 30% 수준으로 낮추고 과표 구간의 액수도 두배 정도는 상향 조정해야 한다고 본다.

우리 국민은 오래전부터 부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강하다. 물론 부유층도 스스로 달라져야 한다. 납세를 비롯한 국민의 의무를 철저히 이행하고 사회적으로 함께 나누는 기부 문화를 실천해야 한다.

부자가 존경받는 OECD 회원국 중 3분의 1에서 상속세를 이중과세로 여겨 아예 부과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상속자가 상속기업을 유지·발전시키도록 유도하는 것으로 보인다. 상속재산을 팔 경우 양도소득세를 부과하는 것으로 아는데, 이것이 더 합리적이지 아닐까 싶다.

과도한 상속세율 때문에 세계적 토종 기업이 문을 닫는 사태는 없어야 한다. 최고의 복지인 일자리를 잃게 되고, 국가 경제도 피해를 보게 된다. 세수에도 장기적으로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차제에 상속세 문제를 공론의 장에서 논의함으로써 기업들이 신바람 나게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낡은 시대의 유물인 상속세 제도를 손볼 때가 됐다.

정의화 전 국회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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