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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병일의 이코노믹스

노예부터 주파수까지…경매이론의 실용화 꽃 피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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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노벨경제학상, 실사구시를 일깨우다 

최병일 한국고등교육재단 사무총장

최병일 한국고등교육재단 사무총장

올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를 발표했을 때, 수상자인 폴 밀그럼 스탠퍼드대 교수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에게 수상 소식을 전한 것은 스웨덴의 노벨상 왕립과학원 노벨위원회가 아닌, 공동  수상자인 그의 스승 로버트 윌슨 스탠퍼드대 교수였다. 윌슨은 전화기를 꺼놓고 단잠에 빠진 그의 제자 밀그럼을 깨우러 한밤중 길을 내달려 그의 문을 요란하게 두드려야 했다.

사제 지간인 윌슨·밀그럼 교수 #경매이론의 실용적 적용에 기여 #현실에 쓰는 정보경제학 만들어 #논문에 갇힌 한국 경제학에 경종

스웨덴 왕립과학원 노벨위원회는 “수상자들은 경매이론을 발전시키고 새 경매 형태를 고안해냈다”며 “그 결과 매수자와 매도자, 전 세계의 납세자에게 혜택이 돌아갔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소더비의 고미술품 경매에서부터 중고차 판매사이트, 수산시장의 새벽 생선 도매 판매에 이르기까지 경매는 우리 일상 곳곳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천연가스 채굴권, 산림 벌목권, 해저 시추권 등 세계 곳곳에서 무수한 공공자산의 매각이 경매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경매의 역사는 고대 절대왕정 시대 노예 경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전력이 공공기관 지방이전 정책에 의해 지방으로 내려간 후 서울 삼성동 한국전력 부지 처리 문제는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그 금싸라기 땅의 주인은 2014년 9월 비공개 최고가 경쟁입찰 방식에 의해 결정되었다. 10조 5500억원의 입찰가격을 제시한 현대차가 주인이 되었지만, 결과 발표 즉시 시중에는 현대차가 “승자의 저주에 빠졌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당시 그 부지의 감정가는 3조 3346억원이었다. 그 탐나는 땅의 주인이 되기는 했지만, 너무 많은 가격을 지불했다는 것이다. 현대차의 낙찰 소식이 전해진 직후 현대차 주가는 하락했고 (발표 전날 21만 8000원에서 발표일 19만 8000원), 기아차·현대모비스 등 관련주 역시 하락했다. 삼성동 부지는 부지 매입 6년인 올해 5월이 돼서야 인·허가를 받았다. 현대차 주가는 지금도 그때를 밑돌고 있다.

물론 속단은 금물이다. 감정가는 토지가격만을 측정한 것이기에, 현대차가 그들만의 독창적인 개발로 자산가치를 상승시킬 수만 있다면 결코 ‘높은 가격’이 아닐 수 있다.

판매자·구매자 모두 이득 보게 해

경매이론의 실용화로 올해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윌슨(왼쪽)·밀 그럼 교수는 사제지간이다. [AFP=연합뉴스]

경매이론의 실용화로 올해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윌슨(왼쪽)·밀 그럼 교수는 사제지간이다. [AFP=연합뉴스]

승자의 저주가 발생한다는 것은 공공정책 관점에서는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 당장은 거액의 수입을 챙길 수 있겠지만, 낙찰된 자산이 적절하게 개발되지 못한다면 그 비용은 다른 부분에 전가될 수밖에 없다. 궁극적으로는 공공자산의 비효율적인 배분을 가져와 희소자원이 낭비되는 사회적 비용을 시민들이 모두 나누어 가지게 된다. ‘승자의 저주’를 최소화하면서 동시에 경매자의 수익도 최대화할 수 있는 방식은 무엇일까. 밀그럼 교수는 경매 참여자 입장에서는 승자의 저주에 빠지지 않으면서 경매 참여 이익을 최대화하는 전략을, 판매자 입장에서는 경매수익을 최대화하는 전략을 연구했다. 이는 전형적인 게임이론의 활용 사례였다. 마침 1990년대 태동한 개인 이동통신 서비스는 그의 실천적 실험의 주 무대가 되었다.

이동통신 서비스를 위해 필수적인 주파수는 국가의 공공자산이다. 주파수를 누구에게 할당할 것인가의 문제는 누가 이동통신 사업자가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과 같다. 1980년대 이동통신서비스 초창기에 세계 각국은 주파수 배분을 사업계획서 심사 또는 복권식 추첨으로 배분했다. 치과의사들이 주파수를 배분받은 후 웃돈을 받고 통신사업자에 사업권을 되파는 일도 뉴스에 등장했다. 미래에 벌어질 사업을 계획서만으로 심사하는 것이 타당한가 하는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경제학자들은 주파수 경매제 도입을 제안했지만, 정책당국은 경매제의 문제점을 보완하지 않으면 경매 역시 돈 내고 돈 먹기라는 납세자들의 선입견을 극복할 수 없다고 부정적인 입장을 내놓았다.

밀그럼 교수의 해법은 ‘동시 다중 라운드(Simultaneous Multiple Round)’ 경매 방식이었다. 여러 주파 대역을 한꺼번에 경매에 내놓고 마지막 낙찰자가 나올 때까지 다수의 라운드를 반복하면서 남은 입찰자들이 계속 새로운 가격을 제시하는 방식이다. 주파수를 하나씩 경매하는 경우 여러 주파수를 사고 싶은 사람은 다른 주파수에 입찰할 돈을 남겨야 하므로 섣불리 금액을 제시하지 않을 것이다. 그 결과 판매자와 구매자 모두의 이득을 낮추게 될 것이다. 동시 라운드 경매는 모든 주파수를 동시에 경매하여 이런 현상을 방지하고, 여러 단계의 입찰 과정을 거치며 경쟁자들이 상대방의 입찰가에 대한 정보를 가늠해볼 기회를 제공했다. 너무 높은 가격을 써내 낙찰자가 ‘승자의 저주’에 빠지거나, 너무 낮은 가격에 낙찰돼 정부나 국민이 손해를 입는 것을 방지했다.

경제학은 경세제민의 본뜻 살려야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는 1994년 7월 동시 라운드 경매로 10개 주의 주파수를 47개 라운드에 걸쳐 판매했고, 1994년부터 2014년까지 1200억 달러를 벌어들였다고 발표했다. 주파수 경매는 미국의 성공을 토대로 영국·캐나다·호주·독일·핀란드·스웨덴·노르웨이·스페인·폴란드 등에서 도입됐고, 한국은 2011년 시작됐다. 5세대(5G) 이동통신 사업자 역시 이 같은 방식으로 선정됐다.

밀그럼 교수가 주도하고 윌슨 교수가 동참한 주파수 경매 설계는 경제학이 실사구시의 학문임을 보여준다. 그들은 탁월한 이론경제학자로 시작했지만, 경제이론의 완벽화·정밀화에만 골몰하지 않고 현실에 적용 가능한 경제이론을 추구했다. 그들 이론의 출발점인 게임이론을 난삽한 수식이 난무하는 학회 논문이나 강의실에만 가두어 두지 않고 현실의 세계로 깊숙이 침투하는 데 성공했다.

경제학을 일컬어 경세제민(經世濟民)의 학문이라고 한다. 일자리·최저임금·소득 불평등·주택가격의 혼란이 시대적 화두인 지금, 한국의 경제학도들은 현실의 실천적인 문제의 탐구보다 소속기관에서 부과된 논문 점수 채우기에 급급하다. 당장 학회지에 게재될 논문에 매달리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합리적인 선택일 수는 있지만, 무수한 한국의 경제학도들이 모두 이 게임에 빠져 있는 상황은 ‘시장실패’ 바로 그것이다. 이 명확하고도 엄청난 실패가 계속된다면, 경제학은 연구실과 강의실에 머물 뿐, 경제학자들은 시대의 난제를 푸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비극적인 상황은 계속될 것이다.

경제학 교수들로 북적댔던 밀그럼 교수 강의실

폴 밀그럼 교수는 1984년 가을학기, 예일대 강의실에서 처음 만났다.

고급 미시경제학을 강의하는 그의 수업에는 박사과정 학생들 보다 교수들이 더 많았다. 경제주체들간의 정보의 비대칭성이 미치는 경제적 영향을 연구하는 정보경제학(Information economics)의 태동기였다. 과학사 연구의 대가인 토마스 쿤의 표현을 빌리면, 이른바 ‘패러다임 전환기’였다. 밀그럼 교수는 그 최전선에 있었다.

밀그럼 교수 자필

밀그럼 교수 자필

스탠퍼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노스웨스턴대에서 조교수 생활을 하던 밀그럼을 예일대에서 정년보장 교수로 전격 스카우트할 만큼 그는 이미 경제학계의 스타였다. 정보경제학이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1980년대 초반은 경제이론의 혁명기였다. 2016년 계약이론으로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그의 학문적 동지 홈스트롬 역시 그와 같은 경로를 거쳐 예일에 도착했다. 홈스트롬 교수와는 1985년 봄 학기 강의에서 인연을 맺었다. 두 사람은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 지도교수가 되었다.

그들의 연구실은 정보경제학 혁명의 본산이었고, 강의실과 세미나실은 혁명의 전파기지였다. 어렴풋이 그 혁명의 파장을 감지하고 참여를 간청했던 나는 그들의 최초의 한국 학생이 되었다. 호기심을 주체 못 해 그들의 연구실을 제집 안방처럼 드나들던 나에게 거장들은 늘 관대했다. 줄이 쳐진 노란색 노트를 펼쳐 들고 나의 질문을 모형으로 만들어 가면서 그 의미를 같이 모색해 갔다. 그들은 늘 이론과 현실과의 연계를 강조했다. 모형은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순 없다.

2010년 여름, 한국을 방문한 밀그럼 교수는 그의 책 『현실에서 작동하는 경매이론』(Putting Auction Theory to Work)에 그 시절을 회상하면서 필자에게 “who was there at the start”(정보경제학 연구 초기부터 나와 함께 했던 병일에게·사진)란 글을 남겼다. 그렇게 시작된 정보경제학 혁명이었다.

최병일 한국고등교육재단 사무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