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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통제 못하면 젊은층 경제활동 평생 위축될 수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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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생애초기 가설로 본 팬데믹과 인적자본

홍석철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홍석철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전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감염되었고 최소 5000만 명의 사망자를 초래한 1918년 인플루엔자는 20세기 최악의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 기록됐다. 그런데 당시 인플루엔자의 피해는 직접적인 인적 희생에만 그치지 않았다. 인플루엔자 감염자 중에는 젊은 여성이 많았고 그들 중 임산부도 적지 않았다. 현대 과학자들은 태아가 산모를 통해 감염병에 노출될 때, 뇌 기능을 포함한 태아 발달에 영향을 줄 수 있음을 밝혀왔다. 따라서 1918년 팬데믹이 태아에 미친 영향은 상당했을 것이다.

유년기에 전염병 돌면 평생 후유증 #건강 나빠지고 교육 기회 줄어들어 #스페인독감 때 태어난 아이들 불행 #질병 퇴치와 환경개선 중요성 커져

2006년 저명 경제학 학술지에 발표된 컬럼비아대 더글러스 아몬드 교수의 연구 결과는 놀라웠다. 1918년에 태아기를 보내고 1919년에 출생한 집단은 팬데믹 영향을 받지 않고 태어난 출생집단에 비해 중년기에 측정한 평균 교육 연수가 유의하게 낮았고 건강 문제를 가진 비율도 현저히 높게 추정됐다. 인플루엔자 대유행이 태아기 영향을 통해 장기적으로 인적자본 축적과 생애 건강에 미치는 인과적 영향을 밝힌 연구 결과였다.

스페인 독감으로도 불렸던 이 팬데믹은 한반도를 비껴가지 않았다. 당시 ‘무오년(戊午年) 독감’이라 불렸던 이 팬데믹은 1918년 10월부터 한반도를 강타해 조선 인구의 44.3%(740만 명)가 감염되었고 14만 명이 사망했다. 당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세균학과 위생학을 강의했던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는 조선인 감염의 심각성과 함께 조선총독부의 대응을 촉구하는 서신을 미국 저명 의학 학술지에 보내기도 했다. 필자는 1960년 인구 센서스 기록을 활용해 1918년 무오년 독감에 노출된 출생집단의 평균 교육 수준이 다른 출생집단보다 현저히 낮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 결과는 유해 질병 퇴치의 장기적인 편익이 매우 크다는 점을 강하게 시사한다.

한국 1960년대 질병 퇴치가 성장 발판

그래픽=최종윤

그래픽=최종윤

이처럼 태아기 유해 환경 노출이 생애에 걸쳐 인적 자본과 건강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주장은 ‘생애초기 가설’로 불린다. 1990년대 초기 연구들은 주로 생애초기 조건이 만성질환 유병과 같은 성인기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졌고, 2000년대 이후에는 인적 자본과 노동생산성에 미치는 영향으로 관심이 확대됐다. 이때 생애초기 조건과 장기 영향의 인과성을 밝히려면 가족 배경 등 다양한 교란 요인의 통제가 필요한데, 1918년 팬데믹 시기에는 감염병 예방과 치료를 위한 의료기술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애초기 감염 가능성은 개인의 사회경제적 배경과 비교적 독립적이었다. 역사적 사건들은 마치 무작위로 감염병 위험에 노출되는 실험과 같은 ‘자연실험’이 된 셈이다.

자연실험 방법에 기반해 생애초기 가설을 검증하는 경제학 연구는 여전히 활발하다. 태아기 감염병 노출에만 그치지 않고 공해와 지구온난화와 같은 환경 요인, 산모 스트레스와 영양 상태 등 생애초기 다양한 조건들이 인적 자본과 경제 성과에 미치는 영향을 규명해왔다. 최신 연구들은 생애초기의 범위를 태아에 국한하지 않고 영유아기까지 확대해, 영유아기 조건 역시 개인의 인적 자본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줄 수 있음을 밝혀왔다. 이제는 ‘가설’이 아니라 이론과 실증으로 증명된 경제학의 주요 분야로 자리매김했다.

일제강점기 월별 사망자수 추이

일제강점기 월별 사망자수 추이

돌이켜보면 한국은 생애초기 질병 환경의 개선이 경제 발전으로 이어진 모범적인 사례다. 정부는 한국전쟁 이후 창궐하는 감염병에 대응하고자 1960~70년대에 걸쳐 질병 퇴치, 영양개선, 식수개선, 보건의료 인프라 확충 사업 등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20세기 초 동일한 문제에 직면한 서구 선진국들이 질병 퇴치를 위해 동원한 사업들이었다. 그 결과 감염병 발병률이 70년대를 거치면서 급감했고 무엇보다 영유아 사망률이 크게 낮아졌다. 한국은 교육 투자로 경제 발전을 이룬 나라로 알려져 있는데 질병 퇴치는 교육 투자의 한계효과를 높이고 국민건강 증진을 도모해 고도성장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1993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포겔 교수는 지난 300년 동안 질병 퇴치와 위생개선이 영국의 산업혁명 이후 경제성장에 기여한 정도가 절반에 가깝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의 경제 발전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팬데믹 통해 ‘생애초기 가설’ 검증

경제학이 다루는 근본적인 문제는 희소한 자원의 효율적 배분 방식이다. 이 점에서 생애초기 가설은 현실적으로도 매우 유용하다. 오늘날 모든 국가는 경제 발전의 중요 요소인 인적자본 개발과 국민건강 증진을 위해 적잖은 재정 투자를 하고 있다. 그리고 가능한 투자 대상은 태아와 영유아부터 청년·고령까지 다양하다. 이때 투자 대비 효과가 큰 쪽의 투자를 늘리는 것은 재정 효율성을 높이는 방안이다. 생애초기 가설 연구들은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생애초기 투자의 중요성을 밝힘으로써 인적자본 투자 효율성 개선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생애초기 가설은 질병 퇴치와 환경개선의 숨겨진 경제 가치를 재평가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지금까지 연구를 통해 역사적으로 밝혀진 일관된 결과는 질병 퇴치와 환경개선에 따른 인적자본 향상 효과는 단기보다는 장기적으로 더 의미가 있다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재정의 투자 결정은 비용-편익 분석 결과에 기반을 둔다. 따라서 질병 퇴치와 환경개선의 경제 가치를 단기적으로 평가할 것이냐, 아니면 장기적 안목에서 볼 것이냐에 따라 의사결정의 결과는 사뭇 달라진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큰 희생을 치른 후에야 질병 퇴치와 환경의 중요성을 깨닫는 경우가 많다. 그나마 그런 관심조차 상황이 종료되면 쉽게 잊히곤 한다.

최근 경제학의 연구 동향은 세대 간 관점에서 질병 퇴치와 환경의 중요성을 찾는 것이다. 최신 연구들은 한 세대가 경험한 질병과 환경문제의 부정적 영향이 자손 세대의 인적자본과 건강에도 영향을 줄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 같은 관점은 후성유전학 등 과학계의 연구 동향과도 일치한다. 앞으로 생애초기투자와 질병 퇴치, 환경 개선 등의 중요성이 더욱 커질 전망이다. 역사적 경험을 교훈 삼아 장기적인 관점에서 생애초기 투자, 질병 퇴치, 환경 개선, 교육개혁, 건강 증진 등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국가 장기 발전 전략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생애초기 가설

태아기와 영유아기 등 생애초기의 경험과 환경이 생애에 걸쳐 만성질환 발병을 비롯한 건강에 그치지 않고 인지능력·교육수준 등 인적자본 발달에 장기적으로 영향을 준다는 이론이다.

산업혁명기에 왜 키가 작아졌나

근대경제학의 문을 열었던 앨프리드 마셜은 1890년에 발간한 저서 『경제학원리』 서론에서 경제학은 생활 수준의 물질적 조건 획득과 활용에 관한 개인과 사회의 활동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했다. 실제로 경제학 이론은 생활 수준 개선을 목표로 하며, 경제학자들은 생활 수준 측정을 위해 심혈을 기울여 왔다. 지금은 1940년대에 개발된 1인당 GDP 지표가 많이 활용되고 있지만, 경제학자들은 생활 수준의 비물질적 측면(교육·건강 등)을 반영하는 포괄적 지표들을 개발해왔다.

성인의 신장은 이런 포괄적 지표로 주목받아왔다. 유전 요인을 통제하더라도 신장이 클수록 노동생산성과 건강 수준이 높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남·북한의 신장 차이다. 분단 직후 남·북한의 평균 신장은 거의 차이가 없었으나, 1990년대 대기근 전후에 출생한 북한 청소년의 평균 신장은 우리보다 10cm 이상 작았다. 최근 서울대 연구팀은 두 집단 간의 인적자본 격차도 크다는 것을 연구하기도 했다.

미국 백인 남성의 평균 신장 추이

미국 백인 남성의 평균 신장 추이

그렇다면 키에 영향을 주는 요소는 영양 공급뿐일까? 1800~1950년 미국 백인 성인 남성의 평균 신장 추이를 보자. 흥미롭게도 1830년대 출생집단부터 1890년대 출생집단까지 평균 신장이 3~4cm 줄어든 것이 관측된다. 이 기간 미국은 산업혁명과 함께 급성장하고 농업 생산성도 빠르게 개선되던 시기였기 때문에 한동안 경제학계의 논쟁거리였다.

경제학자들은 그 원인을 영양 소비 증가에 따른 순영양 상태 감소에서 찾았다. 19세기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대도시를 중심으로 질병과 위생환경이 악화되었고, 특히 성장기 영유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감염병 확산으로 영아사망률은 1000명당 200명으로 뛰어올랐고 잦은 질병은 성장기 영양 상태를 낮춰 성인 신장이 줄어든 것이다.

산업혁명기 영국·프랑스·일본 등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관측됐다. 모두 질병 퇴치의 경제적 의미를 보여주는 역사적 경험이다.

◆홍석철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시카고대 경제학 박사. 경제사적 관점에서 인류 발전에 영향을 주는 사회·경제·환경 요인을 밝히고 있다. 케임브리지대 출판부에서 『변화하는 신체: 1700년 이후 서구의 건강, 영양, 그리고 인류 발전』을 펴냈다.

홍석철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