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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 일변도 시진핑 외교, 마오의 미·소 외교는 달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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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마오쩌둥 카리스마 좇는 시진핑 스타일 

연상모 성신여대 동아시아연구소 연구위원

연상모 성신여대 동아시아연구소 연구위원

건국 70주년을 보름여 앞둔 지난해 9월 12일. 시진핑(習近平·67) 중국 국가주석이 베이징 교외에 새로 복원한 향산 쌍청(雙淸) 별장을 찾았다. 관영 신화사는 시 주석이 “마오쩌둥(毛澤東) 동지의 당시 집무실을 숭고한 경의를 품고 바라봤다(瞻仰·첨앙)”고 묘사했다. 같은 달 29일 건국기념 대형 공연 기념사진을 보면 시 주석 왼쪽에 마오쩌둥 재연 전문 1급 배우 탕궈창(唐國强·68)이 서 있다. 마오에 대한 시 주석의 애정을 엿볼 수 있는 두 장면이다.

마오, 부작용 무시 자력갱생 외쳐 #이념·열정 내세워 권력 유지 몰두 #시, 민간기업 잠식 국진민퇴 추진 #개인숭배 조짐에 언론 검열 강화

시 주석의 마오 ‘따라하기’를 이해하려면 먼저 마오쩌둥 시대(1949~1976)와 덩샤오핑(鄧小平) 시대(1978~2012)부터 비교가 필요하다. 마오의 시대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소위 마오쩌둥식의 사회주의를 추진하던 시기였고, 덩의 시대는 개혁개방을 통해 경제발전을 일군 시기였다. 마오와 덩은 중국을 사회주의 국가로 만든다는 최종 목표를 공유했다. 하지만 목적지로 가는 방법이 달랐다.

끝없는 투사 마오, 실용 관리자 덩

지난해 9월 29일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건국 70주년 공연 기념 사진. 무대 정중앙에 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오른쪽에 마오쩌둥 재연 전문 1급배우 탕궈창(唐國强)이, 왼쪽에 홍콩 배우 청룽(成龍)이 포즈를 취했다. [신화=연합뉴스]

지난해 9월 29일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건국 70주년 공연 기념 사진. 무대 정중앙에 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오른쪽에 마오쩌둥 재연 전문 1급배우 탕궈창(唐國强)이, 왼쪽에 홍콩 배우 청룽(成龍)이 포즈를 취했다. [신화=연합뉴스]

첫째, 비전에 대한 접근방식이 달랐다. 마오는 공산주의라는 ‘이념과 열정’으로 중국을 급진적으로 바꾸려 했다. 덩은 ‘실용주의와 신중함’으로 중국을 발전시키려 했다. 고(故) 로더릭 맥파쿼 하버드대 교수는 마오를 ‘투사형’, 덩을 ‘관리자형’으로 구별했다. 마오는 ‘영원한 혁명’을 추구했다. 이를 위해 중국을 계속 위기로 몰았다. 1958년 대약진운동, 1966년 문화대혁명을 통해 중국의 유산을 폭력적으로 해체했다. 중국을 새롭게 만든다는 명목으로 대중의 혁명적 열기를 동원해 군중 노선과 자력갱생 사상을 확산시켰다. 마오의 혼란을 체험한 덩은 개혁은 질서 있게 이루어져야 하며, 국가는 ‘안정과 통합’을 유지해야 한다고 믿었다. 마오는 중국을 박살냈다. 덩은 부스러기를 모았다. 마오는 끝없는 투쟁을 옹호했다. 덩은 ‘질서·프로페셔널리즘·효율’을 따랐다. 개혁개방을 택했다.

둘째, 통치 형태가 달랐다. 공산당 내에서 마오의 지위는 제국의 황제였다. 마오는 오만에 빠져 중국의 현실을 무시했다. 혼란을 개의치 않고 권력 유지에 급급했다. 수많은 인명 피해와 부작용에 눈을 감았다. 생전에 후계자 문제를 해결 짓지 못했다. 반면에 덩은 독재자를 막고자 했다. ‘집단지도체제’를 제도화하고 국가주석 임기를 10년으로 제한했다. 덩은 개인적 숭배를 포기했다. 질서 있는 승계절차를 마련했다. 1989년 천안문사태 후 덩은 계획대로 은퇴했다. 숨질 때는 은둔자에 머물렀다.

셋째, 대외정책이 달랐다. 마오는 미·소 핵 냉전 시기에 ‘자유로운 행위자’로 행동했다. 상대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두 강대국과 대립했다. 약하게 보이길 거부했다. 타협 대신 도전을 택했다. 서방과 접촉을 피했다. 경제발전을 위해 외국과 교류 대신 ‘자력갱생’에 의지했다. 덩은 겸손하고 실용적이었다. 그는 1978~79년 일본과 미국을 각각 방문했다. 중국의 ‘후진성’을 인정했다. 선진국에 기술 습득의 열망을 보였다. 중국 최고지도자가 중국을 세계의 중심에 놓는 전통에서 완전히 탈피한 태도였다. 힘을 감추는 ‘도광양회’의 실용외교를 추진했다.

카리스마·유연성 갖춘 마오쩌둥

건국 70주년을 앞둔 지난 2019년 9월 12일 오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베이징 교외의 향산혁명기념관의 마오쩌둥 동상 앞에서 마오의 혁명정신 계승을 강조했다. [신화=연합뉴스]

건국 70주년을 앞둔 지난 2019년 9월 12일 오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베이징 교외의 향산혁명기념관의 마오쩌둥 동상 앞에서 마오의 혁명정신 계승을 강조했다. [신화=연합뉴스]

1949년 이후 중국 정치는 마오의 이념과 덩의 실용이 경합했다. 덩의 실용주의는 장쩌민(江澤民)과 후진타오(胡錦濤)가 이어받았다. 시 주석은 다르다. 마오가 부활한 듯하다. 시 주석은 마오와 공통점은 물론 차이점이 함께한다.

첫째, 이념과 비전이 닮았다. 시는 2050년까지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을 건설하겠다고 선언했다. “초심(初心)을 잃지 말자”고 강조한다. 마오의 공산주의 이념이다. 시는 ‘국진민퇴(國進民退)’를 밀어붙인다. 국가가 경제를 장악하겠다는 의지이다. 민간기업은 국유기업에 잠식된다. 사회주의의 근간은 공유경제이며 공유경제를 떠받치는 것은 국유기업이란 논리다.

둘째, 통치 스타일이 닮았다. 시는 집단지도체제를 무력화했다. 권력을 집중시켜 마오에 버금가는 힘을 갖췄다. ‘위대한 영수 마오쩌둥’을 연상시키는 ‘인민의 영수 시진핑’ 용어가 등장했다. 헌법의 국가주석 연임제한 규정을 지웠다. 중국 내에서조차 비판할 정도의 개인숭배 조짐이 나타났다. 언론 통제와 검열이 강화됐다.

셋째, 대외정책이 닮았다. 시는 공세적인 외교를 서두른다. ‘중국의 꿈’을 내세워 민족주의를 고취하고 군사력을 증강한다. 미·중 관계는 악화일로의 위기다. 시는 항쟁수단으로 중국 내수시장의 확대를 외친다. 과거 마오의 ‘자력갱생’으로 돌아가려 한다.

차이도 적지 않다. 첫째, 시는 마오의 카리스마가 없다. 마오는 권력을 스스로 만들었다. 시는 파벌간 타협의 산물로 자리에 올랐다. 둘째, 마오는 좋던 나쁘건 천재이며 모략가였다. 시는 마오의 비범함과 다르다. 시는 철저한 공산주의자이며 중국 중심의 인물로만 알려져 있다. 셋째, 마오는 강대국 미국과 소련을 요리한 외교에서 전략적 마인드를 갖췄다. 나설 때와 멈출 때를 알고 있었다. 적대와 우호를 유연하게 오갔다. 시는 강경 일변도이다. 넷째, 시대가 다르다. 마오 시대는 냉전 시기였다. 미국과 소련이 경쟁했다.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의 뒤에 숨을 수 있었다. 지금은 다르다. 미국의 견제에 가림막이 없다. 다섯째, 시가 추구하는 중국의 비전은 불확실하다. 그는 ‘중국의 꿈’을 주장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중국을 원하는지 불분명하다. 마오는 ‘영원한 혁명’을 위해 기존 체제를 모두 해체하려 했다.

마오의 이념과 열정은 중국을 파탄으로 이끌었다. 덩의 실용주의는 중국의 발전을 가져왔다. 시 주석은 과격한 마오쩌둥을 따르지만 마오가 구사했던 전략적 유연성이 결여된 ‘경직성’으로 일관한다. 국내외 정책에서 중국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는 듯 보인다.

그렇다면 중국의 현재 통치 엘리트는 왜 시진핑 한 명에게 권력을 집중시키는 무리수를 묵인하는가? 일당 체제가 무너질 수 있다는 잠재적 두려움을 공유해서다. 경제 침체와 코로나19 등이 야기한 긴장은 확고해 보이는 시진핑 권력의 겉모습과 달리 내부의 취약성을 함께 표출한다. 정치적 반대자와 소수 민족에 대한 압박, 일대일로와 같이 무리한 외교정책 등 이념적 경직성에 사로잡힌 통치자는 정책의 실수를 고치기 힘들다. 결정의 번복이 무결점의 이미지를 상처입히기 때문이다.

향후 시 주석은 경직성 때문에 안팎에서 저항과 반발을 불러올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바람직한 선택은 무엇일까? 그가 끝까지 마오쩌둥식 투사를 고집할지, 덩샤오핑식 관리자로 변신을 꾀할 것인지 중국은 물론 세계가 숨죽이고 지켜보고 있다.

중국 사정라인 실력자가 옌안 정풍 운동을 외친 이유는

국내외로 어려움에 부닥친 시진핑 주석은 난국을 어떻게 극복할까? 최근 행보에 답이 숨어있다. 첫째, 시 주석은 지난달 22일 지린성에 있는 ‘쓰핑(四平) 전쟁기념관’을 방문했다. “14억 인민과 9200만 명의 공산당원은 공산당이 이룩한 사회주의의 위대한 사업을 보전해 자손만대에 전승하자”고 말했다. 쓰핑 전투는 1948년 공산당이 국민당을 물리치고 대세를 장악한 중요한 계기였다. 최근 미국이 공산당과 인민을 분리하려는 시도에 정면 대응하겠다는 대답이다.

둘째, 중앙 정법위(정치법률위원회)의 천이신(陳一新·61) 비서장이 7월 8일 회의에서 “옌안 정풍(延安整風) 교육을 전개하라”고 지시했다. 2022년 상반기까지 전국 정법계통(한국의 사정라인)의 이행 시간표도 내놨다. 옌안 정풍 운동은 1942년 마오가 근거지 옌안에서 정적을 제거한 사상통일 운동이다. 심복인 천이신이 갑자기 ‘옌안 정풍’을 외친 것은, 중국의 차기 대선 격인 2022년 20차 당 대회까지 당내 이견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칼바람의 예고다.

반발도 만만치 않다. 정예푸(鄭也夫·70) 베이징대 교수는 “시진핑이 언급한 ‘강산’은 공산당이 만든 ‘강산’일 뿐”이라며 “공산당 특권층이 법치를 파괴하며 기득권을 지키려 한다. 도대체 누구를 위해 공산주의 강산을 지켜야 하나”라고 반문했다. 쉬장룬(許章潤·58) 전 칭화대 교수는 “중국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고 비판했다. 공산당 이념과 일당 체제를 강화해 난국을 돌파하겠다는 시 주석의 의지가 주효할지 주목된다.

◆연상모

외교부 중국과장, 주비엔나 대표부 참사관, 주일본 공사참사관, 주상하이 부총영사, 주니가타 총영사로 근무했다. 대만 국립정치대 석사, 성신여대 박사. 서울대 중국연구소 초빙연구원을 역임했다.

연상모 성신여대 동아시아연구소 연구위원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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