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피플] 라가르드 “손주들이 지구에 뭔짓 했냐 물어볼 일 없어야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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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라가르드 ECB총재

크리스틴 라가르드

크리스틴 라가르드

“나도 할머니예요. 어여쁜 손주들이 커서 ‘할머니, 지구에 대체 무슨 일을 한 거예요’라고 묻는 일은 없어야죠.”

기후변화 맞서는 통화정책 선언 #2조8000억 유로 ECB기금 활용 #친환경산업 위주 자산 매입키로 #일부선 “립서비스 불과” 평가절하

크리스틴 라가르드(64·사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최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와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라가르드 총재는 통화정책을 펼 때 기후변화 대처에 우선순위를 두겠다고 강조했다. ECB가 회사채 매입 등으로 시중에 돈을 풀 때 친환경 산업에 힘을 싣겠다는 약속이다. FT는 “ECB 총재가 친환경 정책을 실천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약속한 것은 처음”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라가르드가 믿는 구석은 ECB가 운용하는 2조8000억 유로의 채권 매입 기금이다. 이 기금을 굴릴 때 기후변화 대처를 최우선으로 한다는 구상이다.

FT는 “세계 중앙은행 중 처음으로 환경 문제 해결에 채권 매입 기금을 쓸 전망”이라고 전했다. 유럽연합(EU) 안에서 다른 지도자들과 협조적인 관계도 라가르드에겐 든든한 배경이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 등이다.

사실 라가르드의 ‘발등에 떨어진 불’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확산에 따른 경제위기다. 유로화를 쓰는 19개 국(유로존)의 경제 성장률은 지난 1분기 마이너스 3.6%(전 분기 대비)를 기록했다. 유로존 경제가 언제쯤 회복할 것이냐에 대해선 전망이 엇갈린다. ‘V자형’의 가파른 상승세로 돌아설 것이란 주장과 ‘L자형’으로 바닥을 기는 모습을 보일 것이란 주장이 맞서는 상황이다.

라가르드는 FT 인터뷰에서 “(V자형이냐 L자형이냐 하는) 알파벳 장난은 필요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경제 회복세는 제한적이고 불확실하며 파편적일 것”이라며 “우리는 단단히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라가르드가 제시한 ‘친환경 통화 정책’에 대해선 비판적인 시각도 있다. 환경 단체인 그린피스의 보고서에 따르면 ECB는 지난달까지 화석연료 관련 산업을 지원하는데 76억 파운드(약 11조5400억원)를 쏟아부었다. 그동안 ECB가 매입한 회사채의 4분의 1 규모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라가르드의 발언을 ‘립서비스’라고 평가 절하했다.

라가르드는 미국 법무법인에서 노동법 전문 변호사로 활동하다 프랑스에서 상무·농업·재무부 장관을 차례로 지냈다. 2011년 국제통화기금(IMF)의 첫 여성 총재로 선출돼 8년간 재임했다. 지난해 11월에는 ECB의 첫 여성 총재로 뽑혔다.

FT는 “코로나19 위기 상황에서 라가르드의 정치적 전투력이 돋보였다”고 평가했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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