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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도 보수도 놀랐다…임기 3개월 남긴 권순일의 판결들

중앙일보

입력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지난 2014년 9월 신임 대법관 임명장 수여식에서 권순일 대법관(오른쪽)에게 임명장을 주고 있다. [중앙포토]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지난 2014년 9월 신임 대법관 임명장 수여식에서 권순일 대법관(오른쪽)에게 임명장을 주고 있다. [중앙포토]

퇴임을 3개월 앞둔 권순일(61) 대법관이 진영을 넘나드는 판결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2014년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제청하고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임명한 권 대법관은  '보수 성향의 대법관'으로 인식돼 왔다. 하지만 최근 이어진 그의 판결에 진보와 보수로 분류되는 판사들 모두 '파격적'이란 평가를 한다. 대법원 내부에서는 "권순일이 연타석 홈런을 치고 있다"는 말까지 나오는 상황.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에 언급되며 진보 진영의 탄핵 대상에 올랐던 권 대법관. 지난 총선에선 선거관리위원장을 맡아 거꾸로 야당의 비난을 받았던 권 대법관이 판결을 통해 남기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미혼부 구제와 제주 강정마을 판결 

권 대법관은 지난 2주간 양쪽 진영에서 논쟁을 일으키는 여러 파기환송 판결을 했다. 모두 1·2심 결론이 같았던 사건을 '틀렸다'고 돌려보냈다. 대표적인 두 건의 판결을 꼽자면 첫째는 지난 8일 아이의 출생등록 권리를 최초로 인정한 판결이다. 이를 통해 현행법상 아이의 출생 신고를 할 수 없었던 미혼부와 그 아이들의 권리가 구제됐다.

한국에 통계로 잡히는 미혼부는 7768명(2018년 기준)이지만 학계에선 그 숫자를 최대 3만명으로 본다. 한 현직 판사는 "입법으로나 해결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 문제였다. 법의 해석을 넓힌 획기적 판결"이라 말했다. 소수자의 권리를 넓힌 진보적 판결이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권 대법관은 이 판결 나흘 전인 4일엔 해군 홈페이지에 게시된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글을 해군이 삭제한 행위에 국가 배상 책임이 없다고 판결했다. 해군에 원고 1인당 30만원 배상판결을 했던 원심이 5년만에 뒤집혔다. 천주교인권위원회와 진보네트워크센터 등 시민사회에선 "표현의 자유를 전면 부정하는 판결"이란 논평이 나왔다.

윤진수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권 대법관의 판결은 진보나 보수 등 이분법적으로 나누기 어려운 특징이 있다"며 "한번 판결이 나오면 학계에서도 상당한 논쟁이 뒤따른다"고 말했다. 대법원 내부에선 '권 대법관이 남은 임기 동안 파기할 판결이 아직 여럿 남았다'는 분위기다.

권순일 대법관(오른쪽)이 지난달 28일 대법원에서 열린 '조영남 그림대작 사건' 공개변론에 참석하고 있다. [뉴스1]

권순일 대법관(오른쪽)이 지난달 28일 대법원에서 열린 '조영남 그림대작 사건' 공개변론에 참석하고 있다. [뉴스1]

박정희 긴급조치와 수영장 배상 판결 

실제 권 대법관의 판결을 모아보면 사안에 따라 그가 보수처럼 보이기도, 또는 김명수 대법원에서 가장 진보적인 대법관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를 보수로 보는 이들은 권 대법관이 국가의 손해배상에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 왔다고 말한다.

권 대법관은 2018년 일제 강제징용 손해배상 재상고 사건에선 조재연 대법관과 소수 의견에 섰다. 1965년 한일 협정으로 피해자의 개인보상청구권이 소멸됐다고 봤다. 2015년엔 박정희 대통령의 긴급조치가 고도의 정치성을 띈 행위라 손해배상 청구대상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이에 반하는 하급심 판결이 잇달아 나오고 있다. 지난해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가장 치열하게 다툰 사건인 이승만·박정희 비판 다큐멘터리 '백년전쟁'도 권 대법관은 "정부의 제재가 정당했다"는 소수의견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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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권 대법관은 여성과 아이 등 소수자의 권리에 민감했다. 2018년 판결문에 '성인지감수성'을 처음 언급한 것은 권 대법관이었다. 6살 때 수영장에서 사고를 당한 학생의 손을 들어주며 수영장의 배상책임을 인정한 지난해 판결도 사회와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원심은 "수영장 시설에 하자가 없었다"고 했지만 권 대법관은 '사고 방지를 위해 드는 비용보다 사고 발생시 피해 정도가 더 크다면 시설 관리자에게 불법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법경제학을 꺼내들었다. 권 대법관과 대학 생활을 같이했던 한 고위 법관 출신 변호사는 "권 대법관은 학생 시절부터 상당히 진보적인 생각을 많이 드러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받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3일 오전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속행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뉴스1]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받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3일 오전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속행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뉴스1]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수사 때 고초도 

권 대법관은 지난해 검찰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수사에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 공소장에 공범으로 적시되며 어려움을 겪었다. 아침마다 서초동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출근하던 권 대법관은 검찰 수사 이후 개인적 외부 활동은 모두 끊었다.

권 대법관과 30년 이상 인연을 맺어온 또다른 고위 법관 출신 변호사는 "권 대법관은 검찰 수사가 제기됐을 당시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을 맡고 있어 어떤 입장도 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검찰은 권 대법관을 기소하지 않았지만 참여연대와 정의당 등에선 그를 탄핵명단에 올렸다. 재판연구관 출신 변호사는 "권 대법관은 검찰 수사와 총선 때 모두 논란에 섰지만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며 "남은 3개월간 판결을 통해 자신의 소신을 보여주려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박태인 기자 park.ta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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