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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란] 위기에 강한 화폐 달러, 그리고 비트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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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리틀빅픽쳐스]

[고란의 어쩌다 투자] 영화 『사냥의 시간』을 봤습니다. 새로운 인생을 위해 위험한 작전을 계획한 4명의 친구(이제훈ㆍ안재홍ㆍ최우식ㆍ박정민)와 이를 뒤쫓는 정체불명의 추격 사이의 ‘숨 막히는’ 사냥의 시간을 담아낸 추적 스릴러입니다(‘숨 막히는’ 부분에 대해서는 관람객의 평가가 엇갈립니다). 영화의 재미와는 별개로 블록체인 미디어에서 일하는 기자의 눈에 들어온 건 영화의 배경입니다. 

#경제가 무너지면 달러만 남는다

‘근미래 서울’이라는데 그야말로 ‘헬(hell) 조선’입니다. IMF(국제통화기금)에 두 번째로 구제금융을 신청했습니다. 원화 가치는 폭락하다 못해 아예 휴지 조각이 됐습니다. 편의점에서도 달러만 받습니다. 도박장에서도 통용되는 화폐는 달러입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이 모든 일이 준석(이제훈)이 감옥에 있었던 3년간 벌어진 일입니다. 한 국가의 화폐 시스템이 이렇게 쉽게 무너졌습니다.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요? 전세계 국가에서 지금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짐바브웨가 대표적입니다. 2008년 초인플레이션 덕(?)에 100조 짐바브웨 달러까지 발행했습니다. 1000억 짐바브웨달러로 살 수 있는 것은 계란 세 개뿐이었다고 합니다. 끝내 인플레이션을 잡지 못했고, 2009년 4월엔 아예 자국 화폐를 공식적으로 포기했습니다. 미국 달러화를 공식 결제 수단으로 채택했습니다.

최근에는 베네수엘라가 짐바브웨를 능가합니다. 2월 베네수엘라 중앙은행이 공식 발표한 2019년 물가상승률은 9585.5%입니다. 2018년의 13만%(중앙은행 기준)나 IMF의 예상치 20만%보다는 낮은 게 다행입니다. 공식 수치만 따져도 2019년 초 1000원 하던 빵 값이 연말엔 9만6855원이 됐습니다. 공식 통화인 볼리바르가 명맥은 유지하고 있지만, 시장에서는 달러만 유통됩니다. 결국, 지난해 말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은 미국 달러화 공식 사용을 허용했습니다.

#경제가 불안하면 비트코인을 찾는다

자국 법정화폐 시스템이 무너지면 달러를 찾는 것에 더해 2010년 이후로는 새로운 트렌드가 생겼습니다. 비트코인입니다. 아마 본격적인 시작은 2013년 키프로스 사태가 아닐까 합니다. 지중해 동부에 위치한 키프로스는 2013년 그리스 구제금융의 직격탄을 맞았습니다. IMF는 지원의 전제조건으로 키프로스 최대 은행인 키프로스 은행의 10만유로 이상 예금(개인 포함입니다)에 대해 40%의 손실(헤어컷)을 부담지웠습니다. 법정화폐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자 사람들은 비트코인을 본격 매수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2013년 초 10달러에 불과했던 비트코인 가격이 연말엔 1100달러대로 치솟았습니다.

자국 화폐에 대한 불안감이 커질 때마다 비트코인 수요는 증가했습니다. 암호화폐 전문 미디어 코인텔레그래프는 암호화폐 시장 데이터 플랫폼 코인댄스를 인용해 전 세계적인 코로나19 확산 속에 칠레의 비트코인 거래량이 최대치를 기록했다고 4월 24일(현지시간) 보도했습니다. 미디어에 따르면, 4일 기준 칠레의 비트코인 거래량은 3억3000만 칠레페소(약 4억7500만원)입니다. 칠레 대표 암호화폐 거래소인 크립토마켓의 거래량 역시 최근 급증했습니다. 최근 하루 거래량이 달러 기준으로 3월 30일에 비해 270% 가까이 증가했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도 비트코인 수요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현재 아르헨티나는 미국ㆍ유럽 등의 채권단 및 IMF와 650억달러(80조1200억원) 규모의 부채 구조조정 협상을 진행 중입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원금 일부 삭감과 상환을 3년 늦춰달라고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협상이 진통을 빚으면서 아르헨티나에서는 디폴트(채무불이행)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디폴트를 선언하면 1955년 이후 9번째입니다. 암호화폐 분석업체 아케인리서치에 따르면, 비트코인과 아르헨티나 페소의 주간 거래량이 2018년 1월 이후 1028% 급증했습니다. 코인텔레그래프는 이를 두고 아르헨티나 정부의 디폴트 리스크, 통화 인플레이션 영향이라고 설명합니다.

#지금 레바논에선 비트코인이 50% 이상 비싸게 거래된다

자국 화폐가 불안하면 달러를 사면 되지 왜 비트코인을 찾느냐는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달러를 사면 되는데, 달러를 사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레바논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레바논은 3월 7일 12억달러 규모의 유로채권에 대해 모라토리엄(채무상환 유예)를 선언했습니다. 2주 뒤인 3월 24일에는 “모든 유로본드 채무상환을 중단한다”고 밝혀 사실상 디폴트 상태가 됐습니다. 그야말로 국가부도 위기를 맞았습니다.

경제가 제대로 돌아갈 리 없으니 당연히 비트코인 수요가 늘고, 비트코인 가격이 뛰는 일이 벌어질 것 같습니다. 실제로 <레바논서 비트코인 30% 비싸게 거래... 위기 때면 찾는다>(조인디, 1월 29일)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비트코인 P2P 거래 플랫폼인 로컬비트코인즈의 거래 상황을 보면 레바논에서는 비트코인이 30% 비싸게 거래된다는 내용입니다. 참고로 로컬비트코인즈는 매수와 매도를 중개할 수 있는 중앙화된 거래소가 없는 지역에서 비트코인 거래를 1대 1로 매칭해 주는 플랫폼입니다.

지금도 레바논에서는 비트코인이 비싸게 거래되고 있습니다. 4월 27일 오후 1시 현재 로컬비트코인즈에 올라온 매수 호가는 총 5건, 가격은 1815만1244~2342만960 레바논파운드(LBP)입니다. 달러로 환산하면 약 1만2000~1만3500달러입니다. 같은 시간 코인마켓캡 기준으로 비트코인은 약 7700달러입니다. 곧, 레바논에서는 현재 비트코인이 글로벌 시세보다 55~75% 비싸게 거래되는 셈입니다.

#달러를 사지 왜 비트코인을 사느냐고?

레바논에서 비트코인을 사고 싶은데, 레바논파운드가 아닌 달러로 살 경우엔 어떨까요. 로컬비트코인즈에서 거래 통화를 달러(USD)로 바꿔 봤습니다. 그러자 총 매수 건수가 715건으로 훌쩍 뜁니다. 가격은 대체로 8000달러 안팎입니다. 코인마켓캡 기준 글로벌 시세와 비교했을 때보다 5% 이상 비싸긴 하지만, 그래도 말문이 막힐 정도의 프리미엄은 아닙니다. 

현재 공식적으로 1달러는 1506 LBP입니다. 달러를 기준으로 한 비트코인 가격을 레바논파운드로 환산하면 1200만LBP 안팎에 그칩니다. 공식 환율과 시장에서 통용되는 환율은 엄연히 다른 문제입니다. 시장에서는 레바논파운드의 가치를 그다지 쳐주지 않습니다. 

앞서 나온 질문에 답해보겠습니다. 암시장에서라도 ‘귀한’ 달러를 사지 굳이 비트코인을 찾는 이유는 뭘까요. 그건 실물 지폐 달러는 국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레바논 국민의 경우 국내 거주 인구의 3배를 웃도는 인구가 해외에 살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자유롭게 송금을 하거나, 반대로 해외에 있는 이들이 모국으로 송금을 하려면 법정화폐의 경우엔 은행 시스템을 이용해야만 합니다. 은행 시스템을 이용할 경우 훨씬 고평가된 레바논파운드를 울며 겨자먹기로 이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공식 환율과 시장 환율 사이의 차이만큼 손해를 보는 구조입니다. 

비트코인은 국경이 없습니다. 은행 시스템을 이용할 필요도 없고 필요한 사람들끼리 P2P로 바로 거래할 수 있습니다. 행여나 정부나 은행 등 중앙화된 기관이 개입해 세금이나 수수료 등의 명목으로 떼 가는 비용을 비트코인을 이용하면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곧, 50%를 웃도는 레바논파운드 기준 비트코인 가격 프리미엄은 대부분 달러 프리미엄입니다. 5% 안팎의 달러 기준 프리미엄이 바로 탈중앙의, 국경없는 디지털 화폐인 비트코인에 대한 진짜 프리미엄인 셈입니다.

# 『블랙스완』 저자는 암호화폐를 이용하라고 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예측한 베스트셀러 『블랙스완』(The Black Swan)의 저자 나심 탈레브(Nassim Nicholas Taleb)가 최근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레바논ㆍ이집트ㆍ폴란드 등 외환 거래를 제한하는 나라에서는 “암호화폐가 해결책”이라며 “해외 송금 시 암호화폐를 사용해야 한다”고 말한 게 바로 이런 맥락에서입니다. 탈레브 자신이 레바논 출신이다 보니 국경 없는 디지털 화폐에 대한 고민을 더 진지하게 한 것 같습니다. 그는 지난해 12월 인도에서 열린 컨퍼런스에서도 레바논 정보를 비판하며 “암호화폐가 있어 매우 기쁘다”고 말했습니다.

지금이 위기이기 때문일까요.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의 저자인 로버트 기요사키(Robert Kiyosaki)도 이달 초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비트코인을 ‘민중의 화폐(people’s money)‘라며 극찬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은 금이나 비트코인을 보유해야 한다”라며 “미국 정부가 화폐를 마구 찍어내면서 달러 가치가 하락하고 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신의 화폐인 금이나 민중의 화폐인 비트코인을 보유해야 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대안으로 탄생한 비트코인. 이번 위기 국면에서 그 존재가치를 스스로 입증해낼 수 있을까요. 4월 27일 오후 2시 현재 비트코인은 전날보다 2% 오른 7759달러에 거래되고 있습니다(코인마켓캡 기준).

고란 기자 neor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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