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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핵무기 고집하다 퇴출? 한국전의 진실은 정반대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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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 사령관 겸 극동사령관인 더글라스 맥아더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고 있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 승리 이후 미국 국내에서 정치적 선호가 올라갔고 차기 대선 후보로 급부상했다. 이때문에 해리 트루먼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을 겪었다.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유엔군 사령관 겸 극동사령관인 더글라스 맥아더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고 있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 승리 이후 미국 국내에서 정치적 선호가 올라갔고 차기 대선 후보로 급부상했다. 이때문에 해리 트루먼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을 겪었다.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한국전쟁에서 더글라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이 핵무기 사용을 고집하다 군에서 쫓겨났다는 기존의 분석은 사실과 다른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한국전 당시 미국 합참ㆍ육군ㆍ극동사령부 등 군부 핵심 조직 내부에서 핵무기 사용을 두고 대립했던 사실도 드러났다.

서울대 석사논문, 미국 비밀 해제된 문서 입수해 분석

지금까지 맥아더가 핵무기 사용을 고집했다고 알려진 이유는 무엇일까.

1951년 3월 24일 나왔던 진중 성명 때문으로 보인다. 맥아더는 “중국 해안과 내륙에까지 군사작전을 확대할 수 있다”며 핵무기 사용을 경고했다. 이런 강경 발언은 정전협정을 촉구하던 미 행정부와 충돌해 4월 11일 맥아더 해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게 지금까지의 인식이었다.

하지만 비밀 해제된 미군 문서를 종합해 보면 맥아더와 극동사령부는 핵무기 사용을 미루려는 태도를 보였다. 오히려 워싱턴 군부와 해리 트루먼 당시 미 대통령은 전쟁 초기부터 핵무기 사용을 적극적으로 검토했다. 최근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석사학위 논문으로 제출된 〈중국의 한국전 참전과 미국의 핵무기 사용검토에 관한 연구〉는 비밀 해제된 미군 문서를 토대로 한국전 당시 미국의 핵무기 사용 검토 과정을 자세히 분석했다.

비밀 해제된 국무부 일급비밀 문서에 따르면 1950년 6월 25일 전쟁 개전 당일 트루먼은 반덴버그 미 공군참모총장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트루먼은 “미국 전투기가 동아시아에 배치된 소련 공군기지를 제거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고, 이에 반덴버그는 “시간이 걸리고, 핵무기 사용이 필요하다”는 답변을 했다. 이에 트루먼은 소련 공군기지 격멸을 위한 계획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여기에는 핵무기 사용도 포함됐고 이를 두고 특별한 반론이 없었다.

1950년 12월 작성된 미 육군 작전조사국의 한국전쟁 핵무기 사용 보고서. 작전조사국은 핵무기 사용에 긍정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다. 극동사령부에도 파견돼 핵무기 사용을 위한 다양한 보고서 작성을 주도했다.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1950년 12월 작성된 미 육군 작전조사국의 한국전쟁 핵무기 사용 보고서. 작전조사국은 핵무기 사용에 긍정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다. 극동사령부에도 파견돼 핵무기 사용을 위한 다양한 보고서 작성을 주도했다.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비밀 해제된 미 합참 문서에 따르면 1950년 7월부터 미 육군 내부에서 핵무기 사용을 위한 검토가 시작됐다. 미 육군 작전참모부는 7월 7일 ‘한반도 핵무기 사용 시 소련과 다른 국가 반응’을 검토해달라고 정보참모부에 요구했다.

같은 달 27일에는 공군에서도 핵무기 사용 보고서를 작성했다. 핵무기를 사용하면 어느 정도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지를 검토했고, 지역별 공격 시나리오도 마련했다. 해당 문서는 10~20개 정도의 핵무기가 필요하다고 결론지었다. 다만, 핵무기 사용에 따른 효과는 작고 비효율적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북한 지역에 대규모 산업 지역이 없고, 외부에서 군수 물자가 지원된다는 이유에서였다.

나흘 뒤인 30일 존슨 국방부 장관은 이런 분석을 종합해 트루먼에게 핵무기 사용을 주장했다. 그러나 트루먼은 핵무기 사용을 거절했다. 다만, 핵무기를 탑재할 수 있는 B-29 폭격기 10대를 괌에 배치하도록 명령했다. 이때 핵무기는 미 본토에 그대로 두고 날아갔다. B-29 괌 배치는 당장 핵무기를 사용하지는 않더라도 상황에 따라 핵무기를 투입할 수 있다는 의미다. 실제 사용은 미루면서도 억지 효과를 극대화했던 전술로 평가된다.

1945년 8월 일본 나가사키에 미군이 투하한 핵폭탄이 폭발한 후 생긴 버섯구름 모습. 한국전쟁 당시만 하더라도 미국은 핵무기 사용을 위한 구체적인 준비가 부족했다. 소련의 핵능력이나 미군 스스로 핵무기를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도 확답을 갖지 못했다.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1945년 8월 일본 나가사키에 미군이 투하한 핵폭탄이 폭발한 후 생긴 버섯구름 모습. 한국전쟁 당시만 하더라도 미국은 핵무기 사용을 위한 구체적인 준비가 부족했다. 소련의 핵능력이나 미군 스스로 핵무기를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도 확답을 갖지 못했다.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일단 보류됐던 핵무기 사용 논의는 1950년 10월 말 중공군이 대규모로 참전하면서 다시 시작됐다. 미 공군 문서에 따르면 11월 20일 미 합참 합동전략조사위원회는 “핵무기 배치가 필요한 상황이 임박했다”고 평가했다.

그러자 육군에서 다시 핵무기 사용을 검토했다. 작전참모부는 11월 후반 “유엔군 작전 지원을 위한 핵무기 사용 결정에 대비하고, 맥아더에게 핵무기 사용 능력을 부여할 준비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트루먼도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시작했다. 11월 30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군사적 상황에 따라 모든 수단을 고려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핵무기 사용에 대한 적극적인 고려도 의미하느냐”는 기자들의 확인 질문에 “언제나 핵무기 사용에 대해 적극적으로 고려해왔다”고 답변했다.

중공군은 1950년 10월 말 대공세를 펼쳐 국군과 연합군의 북진을 막았다. 함경남도 장진호로 진출했던 미 해병사단이 철수하고 있다. 미군은 이때부터 후퇴를 거듭하다 흥남에서 모두 철수했다. 미군 역사상 가장 뼈아픈 철수로 비판 받는다. 동시에 생존 자체만으로도 대단하다며 위대한 철수로도 불린다. 미군은 이때부터 핵무기 사용을 다시 검토하기 시작했다.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중공군은 1950년 10월 말 대공세를 펼쳐 국군과 연합군의 북진을 막았다. 함경남도 장진호로 진출했던 미 해병사단이 철수하고 있다. 미군은 이때부터 후퇴를 거듭하다 흥남에서 모두 철수했다. 미군 역사상 가장 뼈아픈 철수로 비판 받는다. 동시에 생존 자체만으로도 대단하다며 위대한 철수로도 불린다. 미군은 이때부터 핵무기 사용을 다시 검토하기 시작했다.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이와 같은 핵무기 사용 논의는 워싱턴 군부가 핵무기를 사용을 먼저 주도했던 정황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러나 극동사령관을 겸직한 맥아더는 핵무기 사용에 신중하게 접근했다.

맥아더와 현장 지휘관이 핵무기 사용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가졌던 이유는 시시각각 변하는 전장 상황에서 핵무기 사용의 필요성과 효과도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특히 한반도 상황을 멀리 떨어진 미 본토에서 판단하는 건 무리라는 입장이었는데 이는 조직간 경쟁 구도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맥아더는 한국전쟁이 세계대전으로 확대될 상황이 아니라면 핵무기 사용이 필요하지 않다는 전략도 고려했다. 하지만 맥아더는 워싱턴에서 이뤄진 핵무기 사용 논의를 바탕으로 실무적인 사용 계획은 준비했다. 1950년 12월 22일에 작성된 미군 문서에 구체적인 논의 과정과 내용이 담겨있다.

한국전 당시 고지전에서 부상당한 동료 병사를 후송하는 미 2사단 병사들의 모습. 미군은 한국전쟁을 시작할때 쉽게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처음 전투에 들어갔던 스미스 부대 패배부터 기대를 벗어난 어려운 전쟁을 경험했다. 맥아더와 극동사령부는 전장의 어려움을 미 본토에서는 잘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진=보스턴헤럴드]

한국전 당시 고지전에서 부상당한 동료 병사를 후송하는 미 2사단 병사들의 모습. 미군은 한국전쟁을 시작할때 쉽게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처음 전투에 들어갔던 스미스 부대 패배부터 기대를 벗어난 어려운 전쟁을 경험했다. 맥아더와 극동사령부는 전장의 어려움을 미 본토에서는 잘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진=보스턴헤럴드]

한 달 전인 11월 29일 맥아더는 극동사령부 참모들에게 “지상 작전 지원을 위한 전술 핵무기 사용 관련 보고서를 준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극동사령부는 “핵무기를 한반도에 사용하는 데 장애가 없고, 적에게 결정적 타격이 가능하다”며 “대규모 증원에 대응하려면 핵무기 120개가 필요하고 이를 일본에 비축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극동사령부의 이런 판단은 전장 상황 분석에 따른 합리적인 추정이다. 11월 25일 대천 지역에 집결한 중공군 2만 명에게 핵무기를 사용할 경우 예상되는 효과를 분석했다. 핵무기 공격으로 중공군 1만 5천명 살상이 가능하다고 추정했다.

트루먼(왼쪽)과 맥아더 사령관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맥아더는 전쟁에서 얻은 승리로 차기 대선 후보로 급부상했고, 트루먼을 향해선 전쟁을 끝낼 리더십이 부족하는 비판이 커졌다.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트루먼(왼쪽)과 맥아더 사령관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맥아더는 전쟁에서 얻은 승리로 차기 대선 후보로 급부상했고, 트루먼을 향해선 전쟁을 끝낼 리더십이 부족하는 비판이 커졌다.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하지만 핵무기는 결국 사용되지 않았다. 정한범 교수(국방대학교)는 “불리한 전장 상황에서 조기 종전을 위해 핵무기 사용이 필요했지만, 세계적인 핵무기 반대 여론을 무시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며 “중국과의 관계도 언젠가는 복원해야 한다는 장기적인 관점도 반영됐다”고 평가했다.

맥아더 해임에 핵무기 사용을 둘러싼 갈등이 미친 영향은 그리 결정적이지 않다. 해임 나흘 전인 4월 7일 트루먼은 브래들리 합참의장의 건의에 따라 “핵무기를 괌으로 전진 배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트루먼이 핵무기 사용을 반대했기 때문에 맥아더를 해임했다는 주장과는 맞지 않는 행동이다.

논문의 저자인 김지진 변호사는 “맥아더의 핵무기 사용 검토는 트루먼과 워싱턴의 군부가 결정한 핵무기 사용을 준비하는 차원에서 이뤄진 검토였을 뿐”이라며 “그동안 맥아더가 핵무기 사용을 주도했다는 논의는 사실과 다르다”고 말했다.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전재성 교수는 “맥아더와 트루먼의 개인 대결 구도가 핵무기 사용을 결정했다는 기존의 이분법적 한계를 지적했다는 데 논문의 의의가 있다”고 평가했다. 전 교수는 이어 “강대국들의 결정은 단순하지 않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다양한 조건에서 결정된다는 걸 보여줬다”며 “앞으로 한반도 비핵화 협상에도 성공하려면 남북한을 넘어선 다각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용한 기자 park.yongh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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