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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문의 검은 돌 흰돌] 바둑 18급도 아는 ‘축’, AI는 왜 모를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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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일러스트 김회룡

일러스트 김회룡

“축을 알면 18급”이란 말이 있다. 축은 바둑에서 가장 초보적인 수법이지만 인공지능(AI)은 가끔 축을 착각한다. 프로기사를 2, 3점 접어내는 까마득한 경지에 올랐으면서도 축을 틀리는 이유는 뭘까.

축은 이론을 알면 아주 간단하지만 AI가 축을 깨치는 것은 어려운 과제다. 중국 원나라 때의 바둑 경전인 현현기경(玄玄棋經)에는 바둑 한판을 거의 다 채우는 복잡 미묘한 축이 나온다. 이런 문제는 현재의 AI도 감당하기 어려울 수 있다.

알파고 제로(ALPHAGO ZERO)가 “축을 가장 늦게 터득했다”고 고백한 점도 놀랍다. 알파고 제로는 바둑 룰만 익힌 뒤 스스로의 학습을 통해 신의 경지에 이른 AI다. 알파고 제로는 학습을 시작한 지 3시간 만에 바둑에 갓 입문한 사람의 수준이 되었고 19시간이 경과하면서 사활, 세력, 집과 같은 바둑의 전략적 요소를 이해하게 되었지만 가장 마지막에 이해한 것이 축이었다.

AI가 왜 가끔 축을 틀리는지, 축이 왜 그토록 어려운지 아무도 명확하게 대답하지 못한다. 로봇은 계단 오르기나 팔 들기처럼 인간에게 아주 쉬운 것들을 어려워한다고 한다. 이것과 축의 문제가 혹 비슷한 것일까. 인간에게 쉬운 것이 AI에게 어렵다는 점이 묘한 위안감을 주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 AI가 더욱 발전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아있다는 사실이 두려움을 주기도 한다.

엘프 오픈고(ELF OPENGO)를 만든 페이스북은 AI가 축을 착각하는 문제를 이렇게 이야기했다. “문제영역에 대한 특별한(domain specific) 규칙을 사용하면 바로 축을 해결할 수 있지만, 우리는 그보다는 이러한 상황을 체계적으로 처리하는 별도의 알고리즘을 개발하고자 한다. 시간이 오래 걸릴지언정 알고리즘 자체에 대한 더 많은 통찰을 주고 다른 문제에 적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알파고 제로에게 바둑 룰만 가르쳐 주고 다른 기보나 기술 등을 일절 알려주지 않았을 때, 다시 말해 스스로 공부했을 때 가장 강했다. 한데 축을 가르쳐 주어 버리면 기계의 통찰력이 약해질지도 모른다. 이 때문에 축을 가르쳐주지 않고 스스로 해결할 때까지 놔둔다. 또한 알파고 제로든 엘프 오픈고든 한국의 ‘바두기’든 대부분의 바둑AI는 인류에 도움이 되는 의료 등 다른 분야까지 사용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한데 축 같은 기술적 문제를 미리 가르쳐주면 소위 이같은 ‘범용성’이 훼손될 수 있다.

얼마 전 이세돌 9단과 대결했던 NHN의 바둑 AI 한돌(HANDOL)은 인간이라면 쉽게 볼 수 있는 장문을 착각해 패배했던 일이 있다. 그래서인지 ‘축 착각’과 함께 ‘사활 착각’을 한다는 얘기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그러나 이런 문제로 AI 대세론이 흔들릴 가능성은 전무하다. AI는 ‘형세판단’이라고 하는 바둑의 가장 어렵고 중대한 대목에서 완벽한 솜씨를 자랑하는데 이는 축 실패를 기억할 수도 없게 할 만큼 엄청난 요소이기 때문이다. 인간 고수도 웬만한 변화는 읽을 수 있다. 문제는 그 수읽기 결과가 유리한가, 불리한가 하는 대목이다. 이 점이 인간에게는 극도로 어려운데 AI는 번개처럼 꿰뚫어 본다. “판세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 “판을 크게 볼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해온 바로 그 부분에서 AI는 초능력을 보인다. 인간의 바둑은 50% 정도가 역전패 또는 역전승인데 AI는 절정의 형세판단 능력 때문에 탁월한 승부 결정력을 발휘한다. 사실 유리한 바둑을 승리로 결정짓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바둑의 수많은 드라마가 바로 이 부분에서 발생하지 않았는가.

요순시대에 만들어져 5천년간 이어져 온 바둑은 AI로 인해 상상조차 못 하던 낯선 세상에 들어섰다. 승부의 고통, 절박함, 불안감 등을 AI는 모른다. 그런 무심한 존재를 반려로 삼아 바둑은 이제 먼 길을 떠나려 한다.

박치문 바둑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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