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루트의 밤' 한국인이 지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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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루트 남부 헤즈볼라 거점 지역이 24일 이스라엘의 공습을 받아 검은 연기에 휩싸여 있지만 건물들은 불을 밝히고 있다. [베이루트 로이터=뉴시스]

30일 새벽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의 호텔 밀집지역인 하므라 구역. 상점들은 문을 닫았지만 형형색색의 네온사인 간판들은 밤새도록 거리를 환하게 밝히고 있다. 이 지역만 보면 지금 이 나라가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박살 나고 있다는 뉴스가 실감나지 않는다.

전쟁 중인데도 전기 공급이 안정적이라는 것도 믿기지 않는다. 가공할 폭격으로 석유.천연가스 시설은 파괴되고, 곳곳에서 도로와 다리가 끊어졌다. 그런데도 12일 이스라엘의 공격이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베이루트 시내가 정전된 적은 한 번도 없다. '중동의 파리'로 불리는 이 도시의 호텔에선 인터넷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현지의 한국전력 직원 두 명의 투철한 직업정신이 이런 '기적'을 만들어 내고 있다. 주인공은 베이루트 소재 한국전력 현지법인의 이선민(49) 법인장과 이종원(45) 부장. 두 사람 덕분에 레바논이 암흑세상을 면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사람이 현지 직원을 관리하며 생산하는 전기는 현재 레바논 전체 공급량의 60%에 이른다.

한전이 위탁 운영하고 있는 발전소는 중남부의 시돈과 북부의 트리폴리 근처에 위치한 두 곳이다. 각각 420MW 규모인 두 발전소는 본래 레바논 전력의 46%를 담당했다. 그런데 전쟁으로 인해 일부 발전소가 가동을 멈추는 바람에 공급비율이 60%로 높아진 것이다.

한전은 8650만 달러(약 850억원)를 받고 올 2월부터 5년 계약으로 두 발전소를 운영하고 있다. 9명의 한전 직원이 근무했으나 전쟁이 터지자 다 철수하고 두 명만 남았다. 이 법인장은 "우리마저 철수하면 레바논이 암흑 속에 빠질 것 같아 도저히 떠날 수 없었다"고 밝혔다. 이 부장은 "회사의 신용을 지키는 것은 물론 전란에 시달리는 레바논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라도 남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13일에는 이스라엘군이 시돈 발전소 주변을 폭격해 아찔했으나 다행히 피해가 크지 않아 긴급 수리해 계속 가동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 현지 직원은 "두 사람의 책임감은 우리 모두를 감동시킨다"며 "이런 사람들이 현대판 영웅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두 사람은 현재 베이루트에 머물면서 유.무선으로 발전소와 상시 연락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조그만 상황이라도 생기면 위험을 무릅쓰고 현장으로 달려간다. "여러분이 아니면 레바논은 마비됩니다. 지금 여러분은 조국을 위해 매우 중요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폭격이 무서워 출근하길 꺼리는 현지 직원들을 다독이는 것도 두 사람의 주요 업무 중 하나다.

베이루트=서정민 특파원

◆ 한전이 운영하는 레바논 발전소=한전은 필리핀.중국에서 발전소를 직접 지어 운영한 적은 있지만 기존 발전소의 운영권만 넘겨받은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올 2월부터 두 발전소를 위탁 운영하고 있다. 소유권은 레바논 전력청이 가지고 있다. 한전은 레바논을 중동 전력사업 진출의 교두보로 삼고 있으며, 나이지리아.인도네시아에서도 발전소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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