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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정 협상의 판 바뀌나…한국노총발 대화 틀 재편 시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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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장(오른쪽)이 12일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한국노동조합총연맹 김동명 위원장과 의견을 나누고 있다. [중소기업중앙회 제공, 연합뉴스]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장(오른쪽)이 12일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한국노동조합총연맹 김동명 위원장과 의견을 나누고 있다. [중소기업중앙회 제공, 연합뉴스]

노사정 대화의 판이 바뀌고 있다. 한국노총이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를 협상 파트너에서 배제하면서다. 대신 중소기업중앙회 등 다른 경제단체와 의미있는 합의를 내놓고 있다. 정부는 사회적 대화 채널의 구도 변화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않으며 관망하고 있다. 자칫하면 경영계를 대표하는 노사정 대화 주체였던 경총이 고립될 위기에 처했다.

[뉴스분석] #한국노총, "경총 외골수" …배제 전략 강구 #중기중앙회 등 다른 경제단체와 협력 강화 #납품단가 조정작업 참여 등 대형 합의 끌어내

한국노총은 최근 김동명 위원장 주재로 회의를 열어 경총과의 관계 재설정 방안에 대해 집중 논의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은호 한국노총 대변인은 "주요 노동현안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경총은 '하나도 양보할 것이 없다'는 식으로 사사건건 반대만 하며 외골수로 일관했다"며 "사회적 대화 주체로서의 자격 문제를 따져봐야 할 시점"이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한국노총, 경총과의 관계 재설정 방침…양측 간 교류 보류

한국노총은 올 상반기 중에는 경총과 접촉하지 않을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오는 25일로 예정된 경총의 정기총회에도 위원장 참석도 보류했다. 이 총회에서 상임부회장을 비롯한 임원진을 새로 꾸린다. 이전까지는 위원장이 참석해 임원 선임을 축하하는 등 우호를 다졌다. 올해는 한국노총 모든 임원이 불참하거나 사무총장으로 격하해서 참석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한국노총은 26일로 예정된 대의원대회에도 경총을 초청하지 않을 방침이다. 필요하면 김 위원장이 신임 인사차 경총을 방문하되 그동안의 협상 태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향후 파트너십에 대한 책임 있는 변화를 촉구하는 방안도 고려 중이다. 한국노총 관계자는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최후통첩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한국노총의 경총 배제 움직임은 지난해부터 감지됐다. 전임 김주영 위원장이 지난해 10월 말 중기중앙회를 방문해 주52시간제 시행과 관련한 의견을 나눴다. 이 자리에선 입장차만 확인했다. 김 위원장은 한 달여만인 12월 17일 다시 중기중앙회를 찾았다. 그리곤 대·중소기업 간 불공정거래 개선을 위한 공동사업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태스크포스(TF)를 꾸려 실태조사와 신고센터 설치, 연구작업을 공동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중기중앙회, 납품단가 조정위에 한국노총 참여…"획기적 합의"

지난달 말 취임한 김동명 위원장은 이달 12일 신임 인사차 중기중앙회를 방문해 대·중소기업 간 납품 단가 공조에 합의했다. 중기중앙회는 24일 출범하는 대·중소기업 납품단가조정위원회에 한국노총의 참여를 적극 검토하기로 했다. 김 위원장이 "기업의 위기는 노동의 위기"라며 위원회 참여를 희망하자 이를 전격 수용했다. 김기문 중기중앙회장은 "대·중소기업 간 격차가 계속 벌어지는 것은 대기업이 이익을 독점하기 때문"이라며 "한국노총이 협력창구 역할을 하면 개선할 여지가 있다"고 응답했다. 고용부 관계자는 "기업 격차 해소차원이라고 하지만 각 기업의 경영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납품단가 조정 작업에 노동계가 참여하는 것은 획기적인 합의"라고 말했다.

박용만 대한상의 화장(오른쪽)과 김동명 신임 한국노총위원장이 12일 오후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밝게 웃으며 환담하고 있다.[뉴스1]

박용만 대한상의 화장(오른쪽)과 김동명 신임 한국노총위원장이 12일 오후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밝게 웃으며 환담하고 있다.[뉴스1]

김 위원장은 취임 인사차 12일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예방한 자리에서도 "기업과 노동자가 함께 힘을 합쳐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준비해 온 인사말 쪽지를 접고 "전에 호프데이 두 번 하신 것 같은데, 저는 폭탄주를 좋아한다"며 분위기를 돋웠다. 박 회장을 한국노총으로 초청하기도 했다. 두 경제단체를 대하는 태도가 경총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지난해 탄력근로제 확대, 두 단체 수장의 극적 담판 합의…"이후 대화 진척 없어"

한국노총의 이 같은 경총 배제전략은 지난해 2월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서 탄력적 근로시간제 단위기간 확대 방안에 합의한 이후 경총의 협상 태도가 꽉 막혔다고 보기 때문이다. 당시 각자의 입장이 첨예하게 맞서며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김주영 전 위원장이 전면에 나섰다. 주52시간제 시행에 따른 기업의 어려움을 무조건 외면할 수 없다는 현실적 인식 때문이었다. 이에 손경식 경총 회장이 화답하며, 두 사람의 담판으로 타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후 서부발전의 용역업체 직원이던 김용균씨 사망 사건을 계기로 사회적 이슈가 된 산업안전문제 등 논의 현안마다 경총의 반대로 사회적 대화가 사실상 멈췄다는 게 한국노총의 불만이다. 이 대변인은 "일본이 제정해 큰 효과를 보고 있는 과로사방지법을 검토하자는 제안에 경총은 '법이란 용어는 무조건 안 된다'고 반대한다"며 "처벌법도 아니고 일하다 다치거나 죽는 노동자가 없도록 '권고' 수준인 내용마저 반대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반면 경총은 법은 결국 규제로 작용한다며 맞서고 있다. 한국노총 관계자는 "중기중앙회 등과 공조를 다지는 데는 경총이 일부 대기업에 편중해 그들만 대변한다는 불만도 있다"고 전했다.

한국노총의 이런 변화는 현 정부가 출범하며 정권 차원에서 전국경제인연합회와 경총을 배제하려 했던 전략과는 결이 다르다. 당시 한국노총은 정부에 역으로 경총이 참여하는 사회적 대화를 요구하며 경총을 고사 위기에서 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고립 위기의 경총 "지켜볼 뿐"…정부 "한국노총과 중기중앙회 협의 등 노사 자율 존중"

남용우 경총 상무는 "한국노총이 사회적 대화에서 (경총을)배제한다고 해서 배제되는가"라며 "현재로선 (한국노총의 행보를)지켜볼 뿐"이라고 말했다. 정부의 생각은 달라 보인다. 고용부 관계자는 "한국노총이 중기중앙회 등과 의미있는 합의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한국노총이 경제단체와 대화를 해서 논의 안건과 합의 내용 등을 제기하면 존중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상 관망하면서 경총 참여 여부와 관계없이 협상 결과물을 수용하겠다는 의미다. 이와 관련 문성현 경사노위 위원장은 최근 두 단체에 "관계를 잘 풀었으면 한다"는 요지의 메시지를 보냈다.

권순원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현 정부 출범 때와 달리 기업에 좋은 분위기가 조성되는 등 변화조짐이 보인다"며 "진보정부에서 노동개혁을 이뤄내기 훨씬 쉽다. 경총이 리더십을 복원해 사회적 대화를 통한 개혁에 나서는 자세 변화가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wols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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