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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호 칼럼

문 대통령은 7년 전에 이미 해답을 알고 있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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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철호
이철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박근혜 정권의 붕괴는 2016년 진박 공천에서 비롯됐다는 게 정설이다. 하지만 불길한 징조는 2014년부터 어른거렸다. 그 상징적 장면이 3대 권력 중추인 검찰·경찰·국세청 2인자 자리에 대구 청구고 출신들을 앉힌 것이다. 지역 안배, 견제와 균형의 원칙은 깡그리 무시됐다. 대구에서조차 “청구고가 다 말아먹느냐”며 핏대를 세웠다. 이런 인사 편중은 그해 말 정윤회 문건 사건이 터지면서 더 노골화돼 검찰총장(김수남)과 경찰청장(강신명)까지 올라갔다. 불안하고 궁지에 몰릴수록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집착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이는 정치적 자살 행위다. 박 전 대통령은 최순실을 차단하지 못한 채 문고리 3인방과 십상시에 둘러싸여 탄핵의 길로 갔다.

조국·유재수보다 뇌관은 울산 사건 #측근에만 기댄 국정은 정치적 자살 #7년 전 약속대로 수사 외압 중단과 #드러난 사실부터 엄중히 문책해야

최근 윤석열 사단 숙청을 보면서도 섬찟한 느낌이 들었다. ‘빅 4’인 서울중앙지검장, 검찰국장, 대검 반부패·강력부장(옛 중수부장), 공공수사부장(옛 공안부장)이 호남 일색이다. 전주 출신의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이 인사를 주무른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은 김대중 정권 때도 없었다. 더 큰 문제는 문재인 정권의 불안감이다. 김태우 수사관의 폭로와 윤석열 사태 이후 누구도 믿지를 못하는 분위기다. 같은 이념이거나 특정 지역 출신들만 챙기고 있다. 검찰 인사 때 “소득주도 성장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사상 검증까지 했다고 한다. 지지기반을 ‘운동권 출신+호남’으로 좁히는 퇴행 증상이 뚜렷하다.

왜 이런 무리수를 둘까. 유시민씨가 “가족을 인질로 잡는 저질 스릴러”라고 했던 조국 사태 때문일까? 대통령 측근들이 잔뜩 연루된 유재수 사건 때문일까? 하지만 두 사안은 조국과 친문 실세들의 윤리나 도덕적 타락에 얽힌 ‘양념’일 뿐이다. 더 근본 원인은 울산 시장 사건이다. 문 대통령과 바로 연결될 수 있는 폭발적 휘발성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말 검찰이 이 사건을 본격 수사할 때부터 청와대의 대응도 유례없이 거칠어졌다.

임종석 전 비서실장은 “1년 8개월이나 덮어뒀던 사건을 윤 총장이 서울중앙지검으로 이첩할 때부터 분명한 목적을 갖고 기획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울산에서 오래 묵혀졌던 이유는 따로 있다. 우선 검찰이 함부로 황운하 울산경찰청장을 조사하기 힘들었다. 검·경 수사권 조정이 패스트 트랙에 오르면서 자칫 그 상징 인물인 황 청장에 손을 댔다간 ‘경찰 죽이기’란 역풍을 맞기 십상이었다. 여기에다 수사 방해도 집요했다. 황 청장이 버티던 2018년 12월까지 울산 경찰은 검찰 수사에 비협조적이었다. 보복 인사에 대한 두려움이 지배했다. 황 청장이 대전으로 옮긴 뒤에야 피해 경찰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지난해 10월에는 청와대-경찰청-울산경찰청 사이에 오간 공문까지 무더기로 제출했다. 검찰은 범죄 혐의가 몽땅 담긴 자료들에 놀라 서둘러 사건을 서울로 넘겼다.

이 사건의 무시무시한 폭발력은 검찰 공소장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대통령’이란 단어가 39번 등장하고 “누구보다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할 대통령 비서실이 부당하게 선거에 영향을 미쳤다”는 표현이 반복된다. 공소장의 절반은 황 청장이 얼마나 집요하게 청와대 하명 수사를 집행했는지 생생하게 적시돼 있다. 민변 출신 변호사까지 “초원 복집 사건을 능가하고 이승만 시대의 정치 경찰과 맞먹는 수준”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이 사건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4월 총선 결과에 달렸다. 한국당은 특검을 총선 공약으로 내걸고 원내대표는 “대통령 연루 사실이 나오면 탄핵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비록 헌법재판소 구성이 진보 쪽에 유리하게 바뀌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한 전직 검찰총장은 “공소장 내용 자체가 현직 대통령의 헌법 위반을 시사한다”며 “특검이 구성되면 탄핵 발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우려했다. 덩달아 4월 총선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판이 커지고 있다.

그동안 보수 야권은 파산상태였다. 좌파의 폭주에 맞서 윤석열 검찰과 진중권 전 교수가 대신 싸움의 총대를 멨다. 상식적 국민들은 “탄핵과 조국 사태에서 내 생각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두 사람을 통해 확인받는 기분”이라며 위로받았다. 하지만 윤 총장은 ‘나쁜 놈 잡는 검사’일 따름이고, 진씨도 “저는 여러분이 성토하는 그 빨갱이, 공산당”이라며 보수와 선을 긋는다. 그렇다면 보수 야권은 스스로 일어서야 한다. 더 이상 ‘윤석열 현상’과 ‘진중권 신드롬’에 기댈 때가 아니다. 그나마 황교안 대표의 종로 출마와 유승민 의원의 백의종군으로 간신히 전열을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문 대통령도 ‘야당 복’만 즐기며 뒤로 비켜나 있을 때가 아니다. 치명상을 입기 전에 해법을 찾아야 한다. 다음은 2013년 국정원 댓글 사건 당시 ‘문재인 의원’의 성명서다. “진실을 은폐하고 경찰과 검찰 수사는 방해받고 있다.…시간을 끌수록, 진실을 덮으려 하면 할수록,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물론 박근혜 정부가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검찰 수사에 부당한 외압을 중지하고 드러난 사실은 엄중히 문책하라”고 요구했다. 문 대통령은 7년 전에 이미 답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