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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성과 책임감 없는 소명의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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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문병주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문병주 사회2팀장

문병주 사회2팀장

‘국회제출용’이란 큼직한 다섯 글자가 세로로 도장처럼 각 장마다 찍혀 있는 13장짜리 서류를 다시 펼쳐봤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이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제출한 조국 전 민정수석의 직권남용 혐의(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에 대한 감찰무마 의혹)를 기술한 공소장이다.

기소는 지난달 17일이었다. 팩트 체크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미국의 사례까지 예로 들며 최근 추미애 법무장관이 국회 제출을 막은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개입 의혹 사건’ 공소장보다 불과 2주 전 법원에 넘겨진 것이다.

두 사건은 중대성, 등장인물들의 규모에서 차이가 있다. 하지만 교집합도 있다. 백원우 전 민정비서관은 두 사건에서 모두 법정에 서야 한다. 조 전 수석과 유재수 사건에 거론된 윤건영 전 국정기획상황실장도 울산 상황을 경찰로부터 10회 넘게 보고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노트북을 열며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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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과 동지를 위해야 한다는 일종의 소명의식과 의리도 나타난다. 공소장에 따르면 2017년 유 전 부시장에 대해 청와대 특별감찰반이 감찰을 진행할 때 감찰무마를 위한 전방위적 노력이 있었다. 백 전 비서관은 조 전 수석에게 “참여정부 인사들이 유재수가 과거 참여정부 당시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이니 봐달라고 한다”고 전한다. “현 정권 핵심 인사들과 친분이 깊은데 현(문재인) 정권 초기에 비위가 크게 알려지면 안 된다”는 취지의 의견도 전달했다.

김경수 경남도지사, 윤건영 전 실장, 천경득 총무인사팀 선임행정관 등도 뛰어들어 유재수 구하기에 나섰다.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행정관으로 근무한 사람으로 나와도 가까운 관계다”(윤 전 실장), “참여정부에서 근무한 유 전 국장을 왜 감찰하느냐”(천 선임행정관) 등 감찰의 부당함을 주장했다고 검찰은 기록했다. ‘예전에 고생했는데 이 정도도 못 봐주는 것이냐’라는 보상심리가 묻어난다.

울산시장 선거개입 의혹 사건도 청와대 인사들이 전방위적으로 개입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과정 역시 나름대로의 소명의식이 작용했을 것이란 추측이 든다. 4월 총선에 영향 줄 것을 우려해 수사를 잠정 중단한다는 검찰의 이후 수사, 혹은 일부 야당에서 주장하듯 특검 수사와 재판에 의해 진실이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다가온 정치의 계절, 정치가의 치명적 약점은 객관성과 책임성의 결여라는 100여년 전 막스 베버의 지적을 되새겨봄직한 시간이다. 사건 관련인들이 진정한 소명의식을 갖고 있다면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고,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질 것이다.

문병주 사회2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