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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년 동안 한국인의 쓰린 속은 이게 달랬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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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탄생한 겔포스의 초기 모습. 병에서 따라 먹는 형태가 독특하다. [사진 보령제약]

1975년 탄생한 겔포스의 초기 모습. 병에서 따라 먹는 형태가 독특하다. [사진 보령제약]

 매일 맵고 짠 음식을 먹는 식습관 때문만은 아니다. 야근, 공부에 시달리고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사느라 스트레스가 많은 한국인은 위장병을 달고 산다.

[한국의 장수 브랜드] 24. 겔포스

1975년 등장한 위장약 겔포스는 지난 45년간 가장 친숙한 응급약이었다. 갑자기 속이 쓰리거나 산이 역류하는 느낌이 들 때 급히 하나 짜 먹는 국산 약 중 맏이다. 85년 나온 알마겔(유한양행)과 함께 한국에서 가장 많이 복용 되는 위장약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팔린 겔포스는 16억5700만포. 한 줄로 세우면 지구 4바퀴를 돌 수 있다. 45세 장년이지만 제산제 시장에서 확고한 1위(시장점유율 58.4%)를 지키면서 연간 150억원의 매출을 올린다.

알고 보면 뿌리는 프랑스

69년 김승호(88) 보령그룹 회장은 처음 유럽 땅을 밟았다. 57년 낸 보령약국을 보령제약으로 재창업해 사장으로 취임한 지 6년 되던 해였다. 일본제약전문지의 초청으로 참여한 유럽 의약품 업계 시찰 행사에서 김 회장은 신세계를 봤다. 새로운 기술개발과 의약품 개발 현장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김 회장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현탁액(미세한 입자가 물에 섞인 것) 형태의 위장약이었다. 알약이나 가루약이 전부였던 한국에서도 이런 약을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귀국한 뒤 바로 연구부서를 신설하고 새로운 약 개발에 몰두했다. 72년 3월, 이제는 사라진 프랑스 제약사 비오테락스(Biotherax)와 기술 제휴를 맺었다.이후 3년만인 75년 6월 나온 제품이 겔포스다

7겔포스의 인기가 치솟자 보령제약은 1979년 경기도 안양에 전용 공장을 세웠다. 이 공장은 90년대 초까지 가동됐다. 현재 겔포스는 경기도 안산 보령제약 공장에서 생산된다. [사진 보령제약]

7겔포스의 인기가 치솟자 보령제약은 1979년 경기도 안양에 전용 공장을 세웠다. 이 공장은 90년대 초까지 가동됐다. 현재 겔포스는 경기도 안산 보령제약 공장에서 생산된다. [사진 보령제약]

겔포스는 현탁액을 뜻하는 ‘겔(Gel)’과 제산 효과를 뜻하는 포스(Force)가 합쳐진 이름이다. 두 가지 겔이 상호작용과 보완을 통한 피복작용으로 위벽이 위산이나 펩신(소화효소)에 손상되는 것을 보호한다. 궤양 발생을 예방하고 상처 부

위를 보호하는 효능이 있다. 너무 많이 분비된 위산을 잡기에 그만이다

‘수사반장’ 인기 업고 “위장병 잡혔어”

하필 개발한 신약이 위장약이었던 것은 우연과 필연이 겹친 결과다. 당시 비오테락스가 판매하는 위장약은 전 세계적으로 10억포씩 팔리던 제품이었다. 맵고 짜게 먹는 한국인의 식성과 급속한 산업화로 야근과 스트레스, 음주로 위장병 환자가 증가했다.

출시 직후엔 외면을 받았다. 물약, 가루약, 알약에 익숙했던 한국 소비자에게 걸쭉한 약은 너무 생소했다. 첫해 성적은 6000만원에 그쳤다.

80년대 겔포스 신문 광고. '수사반장' 형사를 모델로 인지도 올리기에 기여했다. [자료 보령제약]

80년대 겔포스 신문 광고. '수사반장' 형사를 모델로 인지도 올리기에 기여했다. [자료 보령제약]

하지만 곧 폭발적인 성장을 했다. 중노동의 시대였던 70년대 휴일 없이 일하는 근로자의 상당수는 술을 유일한 낙으로 삼았다. 겔포스는 “숙취 해소 효과가 있다”는 입소문을 탔다. 당시 주당들은 ‘위벽을 감싸 줘 술 마시기 전에 먹으면 술이 덜 취하고 위장을 보호한다’고 믿었다.

근거가 희박하지만, 어쨌든 겔포스는 술자리 전 필수품이 됐다. 보령제약은 안양에 겔포스 전용 공장을 지을 수 있었다. 단일 제약공장으로는 당시로써는 최대였던 6611㎡(2000평) 시설을 마련했다. 79년이 되자 매출은 10억원을 찍었다.

마치 한국이 전쟁에서 진 것 같다는 군의 압력에 하루만에 거둬들인 지면 광고. [사진 보령제약]

마치 한국이 전쟁에서 진 것 같다는 군의 압력에 하루만에 거둬들인 지면 광고. [사진 보령제약]

‘위장약=겔포스’라는 공식이 굳어진 것은 드라마 ‘수사반장’의 공이 크다. 80년대 중후반에는 ‘수사반장’ 속 형사들이 “위장약 잡혔어”를 외치며 인지도를 높였다. ‘속쓰림엔 역시 겔포스’라는 카피도 인지도를 높이는 데 한몫했다. 겔포스 광고 캠페인 중 가장 화제가 됐던 광고는 80년대 초 철모와 나비를 매치한 ‘위장에 평화를…’이다.

80년대 당시 이 광고를 내보내자마자 보안사에서 연락이 왔다. 국방법에 군장비를 매개로 한 광고는 못 하도록 돼 있기 때문이다. 군인이 죽어서 패전했다는 의미로 보인다는 것이 보안사의 이유였다. 제휴사인 비오테락스는 광고 시안을 보고 찬사를 보냈지만, 엄혹했던 시대 분위기 따라 캠페인은 단 하루 만에 종지부를 찍으면서 광고사에 남았다.

겔포스의 변신

세월을 통해 제품력을 검증받았지만 짜 먹는 위장약 시장은 만만하지 않다. 국내엔 겔포스 출시 이후 다양한 경쟁자가 등장했다. 알마겔과 함께 개비스콘(옥시레킷벤키저), 트리겔(대원제약) 등이 경합 중이다.

이 때문에 성분과 디자인에 계속 변화를 주고 있다. 지난 20015년엔 발매 40주년을 맞아 포장을 모던한 노란색 디자인으로 바꾸고 복용하기 좋도록 입이 닿는 부분을 뾰족하게 튀어나도록 개선했다.

중국에서 '포스겔'이라는 이름을 팔리는 겔포스. 연간 600억원의 매출을 올린다. [사진 보령제약]

중국에서 '포스겔'이라는 이름을 팔리는 겔포스. 연간 600억원의 매출을 올린다. [사진 보령제약]

겔포스는 일찌감치 해외 시장 개척에 나섰다. 80년부터 수출한 대만에서는 제산제 시장의 70%를 점유하고 있다. 한때는 점유율 95%, 모방 제품 99개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겔포스는 또 중국에 진출한 첫 국산 약(중국명은 ‘포스겔’)이라는 기록도 갖고 있다.

중국과 국교를 수립하자마자(1992) 수출을 시작했다. 중국에선 한국과 달리 전문의약품으로 지정되면서 한동안 고전했다. 하지만 2004년 연 매출 100억원을 돌파했고 지난해는 약 600억원을 기록했다. 중국에 가장 많이 수출되고 있는 한국 약품(현지 생산 국내 제약사 제품 제외)이기도 하다.

전영선 기자 azu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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