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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웰빙에서 웰다잉으로…인생의 아름다운 마무리, 스스로 결정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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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원혜영 국회의원 웰다잉시민운동 공동대표

원혜영 국회의원 웰다잉시민운동 공동대표

정계 은퇴를 선언한 뒤 부쩍 많아진 인터뷰에서 빠지지 않는 질문은 “은퇴 후엔 어떤 일을 할 것인가”였다. 평소 생각대로 “민간영역에서 웰다잉(Well-dying) 문화 확산을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고 대답하면 추가 질문이 따라붙는다. “정치와 관련된 일은 전혀 안 하실 생각이세요?”라고.

6년후면 노인 20%의 초고령사회 #존엄 잃지않는 웰다잉 운동 펼칠 때

사람들은 웰다잉이 정치와 아주 무관한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긴 그동안 정치는 철저하게 웰빙(Well-being)의 영역이었다. 어떻게 하면 더 편안히 잘 살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것이 그동안 우리 정치의 역할이었으니, 죽음 같은 것이 그 안에 들어올 리는 없었다.

그런데 그 ‘죽음’이라는 것이 정치의 과제로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2008년 2월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 입원 중이던 김 모 할머니의 가족은 소생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되는 상황에서 병원 측에 인공호흡기 제거를 요청했다. 기계에 의존해 생명을 연장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할머니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병원 측은 법적 근거가 없어 의사가 처벌을 받게 된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가족은 소송을 제기했고 마침내 “환자가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 및 행복 추구권에 기초하여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인정되는 경우에는 연명 치료 중단을 허용할 수 있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이 역사적인 사건을 계기로 환자의 자기결정권 문제가 중요한 사회적 의제로 떠올랐다. 필자 역시 해당 분야 전문가들이 참여한 국회 토론이나 세미나를 거치면서 이 문제에 천착하게 됐다. 2015년 여야 국회의원들을 모아 ‘웰다잉 문화조성을 위한 국회의원 모임’을 결성했다.

이듬해인 2016년 1월 무의미한 연명 의료에 대한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법적으로 제도화하는 ‘호스피스·완화 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 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 ‘연명 의료 결정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에 따라 2019년 12월까지 약 53만여 명이 사전 연명 의료 의향서를 등록한 것으로 집계된다.

‘연명 의료 결정법’을 만들면서 크게 깨달은 것이 ‘자기 결정권’의 문제였다. 인간으로서 존엄과 품격을 잃지 않고 삶을 마무리한다는 것은 단순히 연명 의료 조치를 받을 것이냐, 말 것이냐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2026년이 되면 한국사회는 인구의 20%가 노인인 초고령사회에 진입할 예정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부의 노인정책이란 주로 생활안정, 일자리 창출, 치료비 지원 등 복지정책에 머물러 있다. 머잖아 현실로 다가올 거대한 죽음, 그 자체에 대한 대비가 없는 것이다. 이제 정치의 영역을 웰빙의 울타리를 벗어나 웰다잉으로 넓혀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그래서 지난해 9월 30일 ‘웰다잉 기본법안’을 발의했다. 이 법안은 호스피스·완화의료, 장례·장묘, 장기 기증, 유산 기부 등 죽음에 관한 일체의 사항을 당사자가 미리 결정해 준비하고, 이러한 당사자의 의사를 존중해 모든 것이 이행되도록 하는 것을 ‘웰다잉’으로 정의하고 있다. 또 웰다잉에 대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무를 규정하는 내용도 담고 있다. 웰다잉을 정치의 과제이자 국가의 의무로 만들기 위한 것이다.

이 법안까지 통과시키고 물러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나는 정치의 지평을 웰다잉으로 넓힌 것으로 내 역할을 한정하기로 했다. 나머지 일은 다른 이들에게 맡겨두고 스스로 물러날 때를 정함으로써 나름의 자기 결정권을 행사한 것이다.

문화를 바꾸는 주된 방식은 권유하고 본을 보이는 것이다. 그것은 친밀감과 동질성을 바탕으로 한다. 그런 점에서 정치는 그 일에 썩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지금 이 시점에 본격적인 민간 단위의 웰다잉 문화 확산 운동이 필요한 이유다.

원혜영 국회의원·웰다잉시민운동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