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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석 국사편찬위원장의 연변기행(9)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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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전날 밤에 약속한대로 8월16일 오전 5시30분, 일행은 싸늘한 아침공기를 헤치며 백두산의 정상인 천지를 향해 출발했다. 천지까지는 걸어갈 수도 있었으나 우리는 미리 예정되어 있던 대로 지프를 이용키로 했다.

<정상 잇는 도로공사>
그런데 차에 오르자 운전기사는 나와 신용하 교수를 보고『아무래도 남조선에서 온 것 같다』면서『중국외교부에서 남조선사람에게는 이 차를 태워주지 말라고 했는데…』하며 조금 언짢은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우리로서도 기분 좋은 말은 아니었으나 그처럼 어려운 일을 연변대학 쪽에서 애써 주선해준 것이었기에 잠자코 차창 밖을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아침 일찍인데도 천지로 올라가는 길의 좌우에는 중국인노동자들이 벌써 나와 일을 하고 있었다. 내년의 북경아시안게임 때 관광객들이 몰려올 것에 대비, 장백산 호텔 앞에서 백두산정상까지를 잇는 도로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라는 설명이었다. 꼭두새벽부터 일행의 기분을 상하게 했던 지프 운전기사는 우리의 기분 따위는 아랑곳없이 마치 이 길에 익숙하다는 것을 과시라도 하듯 공사가 한창 진행중인 험한 길을 내리 달리는 것이었다.
평소 그런 과격한 운전에 길들여있지 않은 일행으로서는 겁도 나고 걱정스럽기도 한 조마조마한 상태에서 30분 가량 달렸을까, 일행이 안도의 숨을 쉬며 차에서 내린 곳은 백두산 정상에서 약 2백m쯤 떨어진 곳이었다.

<나도 모르게 만세>
발보다 앞서 달려가는 급한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정상에 오르니 아! 거기, 한눈에 들어오는 백두산 천지. 짧은 필설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그 신비한 경관. 그리고 그 날의 날씨는 어쩌면 그리도 청명했던지….
미국에 있는 이채진 교수로부터 백두산 정상에 두 번이나 올랐지만 그때마다 비가 오거나 혹은 구름과 안개 때문에 바로 눈앞에 있는 천지를 한번도 보지 못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고 또 흔히 백두산 정상에 올라가 보아야 천지의 경관을 제대로 구경하기란 몹시 어렵다고 말들을 해오던 터인데 이처럼 좋은 날씨에 천지를 보게된 행운이라니….
특별히 어떤 종교를 믿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신이 내려준 은총이 아닐까 하는 생각조차 들었다.
맑고 고요한 천지의 수면 위로 황금빛 아침햇살이 뻗어가며 안개가 걷히는 그 장관을 두고 정말 신비롭다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은 벅찬 감동의 순간, 나도 모르게 두 손이 올라가고 입에서는『만세』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기원을 이루었던 이 백두산 성지에서 다시 한번 온 겨레의 소원인 남북통일을 마음속으로 기원해 보기도 했다.

<남방 노동자가 작업>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천지의 위용을 마음껏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산중턱에서부터 안개가 밀려 올라오더니 갑자기 천지 위에 무지개가 걸리는 것이었다.
천지에서 무지개를 본다는 것은 맑은 날씨와 더불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데 어쩌면 이것은 백두산이 우리 일행에게만 특별히 베푸는 배려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기막힌 천운 앞에 누구에게 랄 것도 없이 그저 고맙다는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그처럼 감격스럽고 기쁜 가운데서도 다만 한가지, 가슴을 무겁게 만드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의 영산인 이곳을 우리 땅이 아니라 남의 나라 땅을 거쳐 올라왔다는 안타까움이었다. 어쩌다가 이 민족의 성지를 우리는 지키지 못했던가. 후회와 울분으로 새삼 가슴을 쳐보아도, 그러나 백두산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 거기 그대로 묵묵히 서있을 뿐이었다.
안개가 끼면 내려가는 길이 보이지 않아 곤란하다는 운전기사의 성화에 못 이겨 한시간 가량 백두산 정상에 머무른 뒤 아쉬움을 뒤로하고 하산 길에 올랐다. 내려오는 도중에도 중국인 노동자들의 도로공사는 여전했다. 일행은 이들이 백두산근방인 화용현이나 혹은 안도현 사람들인 줄로만 알았는데 실은 중국 남방의 운남성 등지에서 온 노동자들로 남방은 인구가 조밀하여 살기가 어렵기 때문에 이처럼 먼데 까지 일자리를 찾아온다는 것이었다.

<폭포의 위용에 놀라>
역사에서 1910년 이후 1930년까지 사이에 남방의 노동자(고력)들이 중국 동북지역인 만주로 많이 이동했었다는 것은 배웠으나 현재는 중국이 사회주의체제 하에 있어 그렇지 않으려니 생각하고 있었는데 며칠 전 용정 길가에서도 남방에서 이주해온 노동자들을 본적이 있는 데다 이렇게 백두산 도로공사에까지 몰려와 일하는 그들을 대하자니 사회주의체제의 모순이 다시 한번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그들이 도로공사를 하면서 높은 석축을 쌓아 올리는 것을 보니 문득 며칠 전에 가보았던 만리장성이 생각났다. 그 길고 긴 만리장성을 보면서 경악했던 감정을 되살리며 지금 하나하나 석축을 쌓아 올려 가는 노동자들을 보고 있으려니, 물론 그들에게 시간적·공간적 차이는 있겠으나 결국은 한족이라는 한 민족의 저력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만리장성·대운하 등 과연 광대한 대륙의 주인답게 대규모를 자랑했던 그 건축술 속에는 그들 한족의 강인함과 근면성이 내포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천지에서 내려와 아침식사를 하고는 다음코스인 백두산폭포로 향했다. 예전에 보았던 나이애가라나 중국의 경박호폭포와 더불어 또 하나 장엄한 폭포의 위용을 가슴속에 새길 수 있었다.

<이름만은 그대로>
폭포에서 내려오는 길에는 노천온천이 있었는데 보통 계곡에서 볼 수 있는 시냇물처럼 흘러내리는 그 물은, 그러나 잠시동안도 발을 담글 수 없을 만큼 뜨거웠다. 관광객들이 달걀을 넣어 삶아먹기도 한다는 그 온천수가 우거진 삼림·기암괴석 사이로 흘러가는 것 또한 백두산에서만 볼 수 있는 진기한 풍경이었다.
주위의 밀림지대를 둘러보자니 이곳이 바로 우리 독립운동의 근거지 중 하나였다는 생각도 떠올랐다. 그러니 이 심산유곡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가 얼마나 힘들고 그에 따른 희생 또한 얼마나 컸겠는가. 아름다운 자연경관에만 넋을 빼앗기고 있다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그만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이었다.
무엇인가 뒤에 남겨두고 가는 것 같아 자꾸 뒤를 돌아보며 백두산과 아쉬운 작별을 한 다음 다시 연길시로 돌아가는 길은 당초 백두산을 향해 출발했을 때와는 달리 이도백하·송강·삼도구·갑산촌·천수동·어랑촌 등지를 거쳐가는 노정을 택하기로 했다. 이곳들은 바로 청산리 전투의 전적지이기 때문에 들러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보통 청산리 전투라고 하면 하나의 전투가 아니라 당시 치러졌던 여러 개의 전투를 합쳐 일컫는 것으로,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백운평 전투·천수평 전투·어랑촌 전투· 완누구 전투·맹개골 전투다. 백두산을 향해 갈 때 들렀던 곳이 백운평 이었으므로 돌아갈 때는 일부러 길을 돌아 어랑촌 등을 보고 가기로 했던 것이다.
이도백하에서 그 유명한 미인 송을 보고 송 강과 삼도구를 거쳐 약 2시간 정도 달리니 갑산촌 이었다. 갑산촌 이란 한국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자신의 고향 마을 이름을 그대로 부른데서 비롯된 동명이다.
청산리 전투가 있었던 1920년대만 해도 이곳은 한국인의 마을이었으나『지금은 겨우 20호 정도의 작은 중국인 마을로 변해 한국인은 한 사람도 살지 않는다』고 중국인 조홍발(67) 은 말했다.
이곳 갑산촌에서 약 40리 정도 떨어진 곳이 천수평.

<1백16명 사살 공적>
70년 전인 1920년10월 김좌진장군이 백운평 전투를 끝내고 갑산촌 한국인 마을로 이동하여 식사를 마친 뒤 휴식하던 중 이곳 천수평에 도전이 지휘하는 일본군 기마 중대 병력이 주둔해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자 김좌진 장군 휘하의 독립군은 휴식도 마다한 채 천수평을 공격, 일본군 1백16명을 사살하는 대전과를 거두였던 것이다.
갑산촌에서 약 30분 정도 가자 그 천수평 골짜기가 나타났다. 이곳 역시 갑산촌과 마찬가지로 원래는 한국인 촌락이었으나 현재는 약 1백호 정도의 중국인마을로 변해 있었다. 목재의 집산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는 이 마을에는 그러나 70년 전의 우리 독립군전투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안타까움을 일게 했다.
어랑촌은 앞서의 두 마을과는 달리 한국인과 중국인이 반반씩 섞여 살고 있었다. 어랑촌 전투에 관해 혹시라도 알고있는 한국인이 없을까 수소문해 보았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마침 김용선이라는 70세 된 노인이 있어 어랑촌 전투에 관해 물어보았더니 남에게서 전해 들었을 뿐이라며 마치 먼 옛날의 전설로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김좌진과 홍범도의 독립군부대가 일본군을 1천여 명이나 사살했던 대전투에 대해 현지에 살고있는 한국인들조차 이렇게 모르는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자, 소위 독립운동사를 연구한다는 우리들이 여태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나 하는 자책감이 들면서 선조 들의 영령 앞에 몸둘바 몰라지는 것이었다.
하다 못해 기념비라도 하나 세워야 하지 않을까 하는 안타까움에 못난 후손의 머리는 더욱 더 수그러들 뿐이었다. 직접 올라 가보지는 못하고 멀리 완누구의 천수봉 골짜기를 바라보면서 이런 통한에 젖어 있다가 연길시를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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