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대통령 "미국은 실패 없나" 발언 배경은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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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의 25일 발언은 사전에 준비됐다는 인상이 짙었다.

노 대통령은 국무회의가 시작되자마자 한명숙 총리에게 "오늘 의안이 많으냐"고 물었다. 한 총리가 "아닙니다"라고 하자 "싱거운 소리 한번 할까요"라며 운을 뗐다.

그리고는 "1994년도엔가 처음 해외여행을 영국으로 갔는데 총리와 노동당(야당) 의원이 국회의사당에서 주고받는 대화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노 대통령이 소개한 대화는 "총리가 하는 일은 국민 세금이 많이 쓰이는 일 아니냐"는 야당 의원의 질의에 총리가 "노동당도 세금 걱정을 하시느냐"는 답변이었다. 노 대통령은 "한국에서라면 난리가 날 텐데 그냥 넘어가 놀랐다"며 "장관이 소신에 찬 모습으로 답변하는 걸 이번 정기국회에서 보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정기국회를 앞두고 장관들에게 "당당하게 말하라"고 당부하는 형식을 빌리면서 북한 미사일 발사 이후 한반도 상황에 대한 인식을 담았다.

당당하고 소신 있는 발언들로 "한국 장관이 '그 정책은 미국이 성공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고 말하면 안 됩니까" "'의원님께서는 우리가 북한의 목을 졸라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을 한다든지" "의원님께서는 미국은 일체 오류가 없는 국가라고 생각하십니까" 등을 예로 들었다.

일종의 복화술(腹話術) 기법을 동원해 북한을 상대로 추가 제재를 주도하고 있는 '미국식 해법'에 대한 거부감을 표출한 셈이다. 그래서 정부 안에선 노 대통령이 대북 선제공격론을 거론한 일본에 대해 직접 비판한 연장선상에서 미국에 대해서도 간접화법으로 북한 미사일 발사 이후 국면을 강경으로 몰고가선 안 된다는 입장을 전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해석이 뒤따랐다.

청와대 관계자는 "미국과 항상 발걸음을 같이할 순 없는 것 아니냐"며 "미국만 항상 100% 옳다고 보는 인식에도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노 대통령은 한.미동맹의 틀은 유지하되 한국의 국익과 미국의 국익이 배치될 경우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노 대통령은 1월 신년 기자회견에서도 "우리는 미국에 대해 동맹으로서 최고의 예우를 하면서도, 할 말은 하고 협력할 것은 협력하겠다"고 말했었다.

이에 따라 앞으로 6자회담 재개 등 외교적 해결 노력이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할 경우 제재와 대화로 엇갈리는 미.일과 우리 정부의 해법이 서로 충돌하며 동북아에서 외교적 긴장이 높아질 가능성은 여전히 남았다.

노 대통령의 국무회의 발언에는 부수적인 메시지가 하나 더 들어있다. "북한 미사일 문제에서 미국이 제일 많이 실패했다"고 발언해 논란을 빚은 이종석 통일부 장관 등 현재 외교안보팀에 대한 지원의 의미가 담겨 있다. 정부 외교안보정책의 문제점을 거론하며 외교안보팀 경질을 요구하는 정치권에 대해 인사권자로서 분명하게 '노(no)'를 한 셈이다.

박승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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