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법 꼼수에 1m 투표용지 등장? 선관위 초유의 수개표 준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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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선거법 개정을 앞두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도 고민에 빠졌다.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으로 군소정당이 난립할 경우 현재 보유 중인 개표기(투표지 분류기) 사용이 어려워질 수도 있어서다. 경우에 따라선 과거처럼 수개표(手開票)를 해야 할 수도 있다.

현재 선관위에 등록된 정당은 34개이며 창당 절차가 진행 중인 정당은 16개다. 선거법이 개정되고 총선이 다가오면 숫자가 더 늘 수도 있다. 이들이 모두 총선에 비례대표 후보를 낸다면 개표기의 소화범위를 벗어날 만큼 투표용지가 길어질 수 있다. 현재 선관위가 운용 중인 기계로는 34.9㎝보다 긴 투표용지는 개표할 수 없다.

서울 서대문구 명지전문대 체육관에서 지난해 6.13 지방선거 개표작업이 진행되는 모습. 장진영 기자

서울 서대문구 명지전문대 체육관에서 지난해 6.13 지방선거 개표작업이 진행되는 모습. 장진영 기자

총선 전에 새로운 개표기를 도입하기도 어렵다. 예산 편성과 기술 검토 등에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후보자 등록 마감일인 내년 3월 27일까지는 실제 얼마나 많은 정당에서 비례대표 후보자를 낼지 알 수 없다.

선거법에 반대하고 있는 자유한국당은 지난 23일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1.3m 길이의 가상 투표용지를 등장시키기도 했다. 군소정당의 난립이 우려된다면서다. 황교안 한국당 대표는 “비례 정당들이 우후죽순 생겨나 100개가 넘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당의 우려처럼 투표용지가 길어져 개표기 사용이 불가할 경우 20년 만에 수개표로 돌아갈 수도 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엔 개표 인원들이 직접 손으로 개표했고, 2002년 제3회 지방선거부터 개표기가 도입됐다.

다만 이런 일이 실제 벌어질지는 미지수다. 비례대표 후보를 내려면 선관위에 기탁금을 내야 하는데, 후보 한명 당 1500만원이다. 헌법재판소 위헌 결정으로 금액이 500만원까지 낮아질 수 있지만, 그래도 1석이나마 건질 가능성이 크지 않은 군소정당들엔 부담이다. 또한 이 돈은 선거법상 봉쇄조항을 넘지 못하면 돌려받을 수도 없다. 정당 투표에서 지지율 3% 이상을 획득하거나, 지역구 당선자 5명을 내야만 비례대표 당선자를 배출할 수 있고 기탁금도 돌려받을 수 있다. 선관위 관계자는 “예상보다 후보자를 낸 정당 수가 적을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선관위는 필요할 경우 기표에 지장을 주지 않는 범위에서 투표용지 각 칸과 여백의 크기를 조정할 수 있다. 정당 수가 과거보다 늘더라도, 어느 정도 선까지는 각 칸의 크기를 줄여 34.9㎝ 길이의 투표용지 안에 다 넣는 게 가능할 수 있다는 얘기다.

선관위 관계자는 “아직 선거에 나설 정당이 얼마나 될지 알 수 없어 수개표 등에 대해 공식 검토한 건 아니다”며 “우려대로 후보가 너무 많을 경우 유권자 편의, 개표 안전성 등을 고려해 칸을 줄이거나 과거처럼 사람이 직접 개표하는 방식을 고민할 것”이라고 말했다.

윤정민 기자 yunj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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