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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 좀비’로 진화한 정찬성, 그 뒤엔 두 스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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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승리 후 포효하는 정찬성. 송봉근 기자

승리 후 포효하는 정찬성. 송봉근 기자

종합격투기 UFC의 ‘코리안 좀비’ 정찬성(32)이 ‘스마트 좀비’로 진화했다. 정찬성은 21일 부산 사직실내체육관에서 열린 ‘UFC 파이트 나이트 부산’ 메인 이벤트인 페더급(66㎏급) 경기에서 프랭키 에드가(38·미국)를 1라운드 3분18초 만에 TKO로 무너뜨렸다. 압도적인 승리였다. 맞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 처절한 난타전을 벌였던 기존 ‘좀비식 파이트’와는 거리가 멀었다. 본능과 감각에 의존하는 대신 상대의 공격을 예측해 미리 차단했고, 정확하게 펀치를 꽂았다. 화끈한 경기를 펼친 정찬성은 이날 출전자 중 ‘최고의 퍼포먼스를 펼친 선수’에 선정됐다. 정찬성은 22일 전화 인터뷰에서 “준비 과정부터 경기 내용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다”며 “앞으로는 ‘좀비’ 대신 ‘스마트 좀비’로 불려도 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UFC 페더급서 에드가에 TKO승 #계산된 플레이로 상대방을 압도 #에디 차 코치 맞춤식 전략 주효 #알바라신 코치 디테일 훈련 효과

정찬성의 이런 완승은 예상 밖이다. 페더급 6위 정찬성은 당초 2위 브라이언 오르테가(28·미국)와 맞붙기로 했다. 그런데 최근 무릎 부상으로 오르테가의 출전이 무산됐고, 상대가 4위 에드가로 바뀌었다. 레슬링 강자 에드가는 주짓수가 주 무기인 오르테가와 스타일이 다르다. 2010년 라이트급 챔피언을 지낸 UFC의 레전드로, 큰 경기 경험도 많다. 전문가들은 순위는 두 계단 낮아도 오르테가보다 에드가를 더 까다로운 상대로 봤다. 정찬성은 대회 직전 상대가 바뀌는 변수 탓에 안방에서 경기한다는 것 빼고는 이점이 없어 보였다.

정찬성은 에릭 알바라신 레슬링 전담 코치(왼쪽)와 에디 차 타격 코치(아래 오른쪽)의 도움을 받아 지능적인 타격가로 거듭났다. [사진 알바라신]

정찬성은 에릭 알바라신 레슬링 전담 코치(왼쪽)와 에디 차 타격 코치(아래 오른쪽)의 도움을 받아 지능적인 타격가로 거듭났다. [사진 알바라신]

불안 요소를 잠재운 건 ‘디테일 훈련’과 ‘맞춤식 전략’이었다. 이를 준비한 건 두 격투기 고수, 바로 재미교포 에디 차(39) 타격 코치와 에릭 알바라신(37·미국) 레슬링 전담 코치다. 에디 차와 알바라신은 세계 최고 선수들이 즐비한 미국에서도 정상급 지도자로 꼽힌다. 에디 차는 UFC 라이트급 챔피언을 지낸 한국계 벤슨 헨더슨(미국)을 길러냈다. 알바라신은 현재 UFC 두 체급 챔피언(플라이급, 밴텀급) 헨리 세후도(미국)의 스승이다. UFC에선 시합 직전 코치를 섭외해 팀을 꾸리곤 한다. 유능한 코치 급여는 한 달에 1000만원이 넘는다.

정찬성이 두 코치를 찾게 된 건 지난해 11월 야이르 로드리게스(멕시코)한테 패하면서다. 정찬성은 주도권을 잡고도 경기 운영 미숙으로 KO패를 당했다. 정찬성은 “다잡은 경기를 놓치면서 처음으로 혼자 시합을 준비하는 데 한계를 느꼈다. 더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해선 도움이 절실하다고 판단했다”고 두 코치를 찾은 배경을 설명했다. 6월 헤나토 모이카노(브라질)를 TKO로 꺾은 정찬성은 이번 승리를 계기로 전성기를 맞았다. 정찬성은 “두 코치는 이름과 얼굴 정도만 알려져 있다. 내가 두 사람과 함께 훈련했는지는 격투기 마니아는 물론 전문가도 잘 모른다. 두 사람은 내게 보물 같은 존재”라고 소개했다.

정찬성은 에릭 알바라신 레슬링 전담 코치(위 왼쪽)와 에디 차 타격 코치(오른쪽)의 도움을 받아 지능적인 타격가로 거듭났다. [사진 에디 차 인스타그램]

정찬성은 에릭 알바라신 레슬링 전담 코치(위 왼쪽)와 에디 차 타격 코치(오른쪽)의 도움을 받아 지능적인 타격가로 거듭났다. [사진 에디 차 인스타그램]

에디 차는 드라마 ‘올인’의 실제 주인공인 바둑기사이자 프로도박사 차민수(68)씨 아들이다. 에디 차는 격투기 외에 포커 선수로도 활약했다. 타격은 물론 상대 심리까지 꿰뚫는다. 에디 차는 선수 영상을 수백 번 반복해 보며 상대의 공격패턴과 습관을 찾아내고 대응책을 마련한다. 정찬성은 양손으로 얼굴을 막는 대신, 왼손을 내리고 스파링했다. “한 손을 내려야 기습 태클에 반응할 수 있다”는 에디 차의 조언에 따른 것이다. 정찬성은 눈 수술 이후 사물이 겹쳐 보이는 부작용에 시달린다. 이를 고려한 것이다. 정찬성은 “에드가의 팔길이가 짧아 한 손을 내려도 펀치를 쉽게 하지 못할 거라고 심리까지 꿰뚫은 맞춤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상대가 에드가로 바뀐 건 미국 전지훈련 6주차 때였다. 당초 훈련 일정은 7주간이었다. 앞선 훈련은 헛수고가 됐다. 바뀐 상대를 대비할 시간은 일주일뿐이었다. 그때 알바라신이 나섰다. 미국 레슬링 국가대표(54㎏급) 출신인 그는 미국 전역에서 ‘가상의 에드가’인 레슬러 5명을 모았다. 5라운드(각 5분) 스파링에선 정찬성이 라운드마다 새로운 선수와 맞붙어야 했다. 정찬성은 “훈련 막바지에 알바라신 코치가 ‘이만하면 에드가는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말했는데, 자신감이 넘쳤다”고 말했다. 정찬성은 에드가의 두 차례 태클을 상체를 숙여 깔끔하게 막아냈고, 에디 차에게 배운 정확한 펀치를 두 차례 적중시켰다.

정찬성의 경기력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 가족애다. 정찬성은 2014년 박선영(35)씨와 결혼해 두 딸(은서, 민서)과 아들(정겸)을 뒀다. 부인 박씨는 전지훈련 내내 정찬성은 물론 코칭스태프 식사와 뒷정리까지 책임졌다. 정찬성은 “아내 덕분에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다. 항상 고맙다”며 “아이가 셋이다.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며 열심히 돈을 벌겠다. 다음 목표는 챔피언”이라고 말했다.

부산=피주영 기자 akap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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