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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협 존재 이유는 ‘죽어도 농민’…농가소득 5000만원 보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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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4호 02면

김병원 농협중앙회장

김병원 농협중앙회 회장은 익숙한 것과 결별해야 변화하고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농협이 변화하고 있나’하는 여론조사에 ‘그렇다’는 응답이 과거 12%에서 지난해 70%로 솟은 이유다. 물론 농협의 존재 이유인 농민을 위한 변화다. 박종근 기자

김병원 농협중앙회 회장은 익숙한 것과 결별해야 변화하고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농협이 변화하고 있나’하는 여론조사에 ‘그렇다’는 응답이 과거 12%에서 지난해 70%로 솟은 이유다. 물론 농협의 존재 이유인 농민을 위한 변화다. 박종근 기자

힘겹게 보릿고개를 넘기고 있을 때 아버지 친구가 오셨다. 어머니는 옆집에서 쌀 한 줌을 빌려와 밥을 지으셨다. 오랜만에 맡는 쌀밥 냄새에 아궁이 곁을 떠나지 못했다. 손님상에 오르기도 부족했던 밥이었지만, 행여 남기라도 하면 맛볼 요량으로 상물림을 기다렸다. 하지만 깨끗하게 비운 밥그릇을 보고 울음을 터뜨린 나를 둘러업고 어머니는 서둘러 부엌을 나가셨다.

‘변화’ 키워드, 책 4권 출간 #조합장 땐 전국 첫 ‘파머스 마켓’ #농협 정체성 고민 ‘이념교육원’도 #농민 위한 길은 #농가소득 올릴 수 있는 곳에 투자 #과거 농협은 이익만 좇아 욕먹어 #농업의 미래 #안성에 청년 농부 사관학교 열기로 #융복합 교육, 졸업생 연 500명 배출

이 아이는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농업경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농협 조합장을 거쳐 중앙회 회장이 됐다. 뼛골 빠지게 일해도 찢어지는 가난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던 농사일에 넌더리가 났을 법도 한데 무엇이 그를 평생 농업에만 매달리게 만들었을까. 퇴임을 몇 달 앞둔 농협중앙회 김병원 회장을 만나서 그것부터 물었다. 거창하지만 공허한 답변 대신 멋없지만 현실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대학 갈 형편이 안되니까…. 그때는 농고를 나오면 공무원이나 농협직원, 선생님 등 할 수 있는 게 많았다. 5급 공무원, 법원직 공무원 시험에도 합격했는데 외아들이어서 부모님 곁에 있을 수 있는 농협을 택했던 거다.”

그때 농협은 지금과 이미지가 많이 달랐다. 농민을 위한다기보다 농민 위에 군림하는….
“협동조합이라는 근본 취지와는 달리, 정부 주도로 만들어지다 보니 한계가 있었다. 농협이 자립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어서 더욱 그랬다. 그래도 농민들에게 필요한 비료와 농약, 영농자금을 공급하는 역할을 농협이 했다. 최소한 농촌의 고리채를 해결한 공까지 부인할 수는 없다.”

하우스 짓고 농민 설득해 버섯 재배도

임기 중 해마다 책을 냈다. 네 권의 책을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가 ‘변화’인 것 같더라.
“농협에 들어가 보니 새로운 사업 모델을 찾으려는 노력 없이 정부가 만들어놓은 틀 안에서만 움직이고 있었다. 농협 중앙회 역시 정부에서 지원하는 비료와 농약, 자금의 지급 대행 같은 관성적 업무만 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생각한 게 변화다.”
지역농협 직원의 힘으로 변화를 추구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일반 직원은 15년이 지나야 부장으로 진급할 수 있었다. 그런데 승진시험을 보면 9년 안에 상무가 될 수 있었다. 집을 나와 도서관에서 자며 시험 준비를 했다. 3년 만에 합격해 서른네 살에 상무가 될 수 있었다. 당시엔 조합장 아래 전무 없이 바로 상무였다. 변화를 주도할 힘이 있었다.”
처음 시도한 변화는 무엇이었나.
“나주 동강농협이라는 작은 농협에 상무로 갔다. 그곳에서도 농가들이 벼농사만 지으니 소득이 오르지 않았다. 그때 새로운 느타리버섯 종균이 나왔다. 느타리버섯을 재배하면 벼농사보다 3~4배 이상 소득을 올릴 수 있겠더라. 장성 종균사업소 옆에 하우스를 짓고 농민 스무 명을 설득해 버섯 재배를 했다. 농가소득이 많이 올랐음은 물론이다.”
첫 시도치고는 적잖은 성공이다.
“조합장 때도 다른 변화를 모색했다. 1999년에 전국 최초로 ‘파머스 마켓’을 남평농협에 300평 규모로 만들었다. 요즘 영업 중인 ‘로컬푸드’의 전신인 셈이다. 유통단계를 줄이고 농민들이 직접 가격을 결정해 팔도록 했다. 수익성이 높아지고 다품종 소량 생산이 가능해졌다. 나중에 전국 20개 지역으로 확대됐다. 친환경 농산물이라는 개념의 확대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
회장이 돼서는 이념교육원을 만들었다. ‘이념’이란 말이 좀 생소하다.
"이념이란 게 다른 것이 아니다. 협동조합의 정체성과 원칙을 말한다. 농민이 경쟁력을 가지려면 수요가 집중돼야 한다. 그래야 농기계나 비료, 농약 등을 싸게 살 수 있지 않겠나. 농민 개개인의 수요를 집중해서 싼 가격에 공급한다는 것이 농협의 이념인 것이다. 금융업도 마찬가지다. 농민들에게 적정금리로 예금을 받았다가 필요한 농민에게 싸게 공급하는 것이다. 이런 정신을 직원들의 가슴에 새겨주고 싶었다. 농협의 존재 이유는 ‘죽어도 농민’이다. 농민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농민을 위한 길이 뭔가.
"무엇보다 농가소득을 끌어올리는 것이다. 씨를 사서 열매를 수확할 때까지 농민이 혼자 할 수 없는 일을 도와주고, 그렇게 생산한 좋은 농산물을 좋은 가격에 소비자들에게 판매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과거 농협이 욕을 먹었던 것도 그런 농협의 존재 이유를 망각하고 이익만 내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식회사와 다를 게 뭐 있나. 주식회사가 초과이윤이 목적이라면, 농협은 꼭 필요한 이익만 내고 농가소득을 올릴 수 있는 곳에 그 이익을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 회장 사무실에는 각 지역조합 실적을 보여주는 실시간 현황판이 있다. 박종근 기자

김 회장 사무실에는 각 지역조합 실적을 보여주는 실시간 현황판이 있다. 박종근 기자

지금은 달라졌다고 보는가.
"교육의 효과가 크다고 생각한다. 승진하려면 의무적으로 교육원을 거치도록 했다. 그리고 하룻밤을 꼬박 새면서 농민을 생각하고 고민하는 무박이일 콘퍼런스를 임기 동안 19번 했다. 그래선지 지금은 70% 정도의 직원들이 농협의 존재이유에 대해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예컨대 예전에는 건배 제의를 하면 흔히 ‘농협 발전을 위하여!’라는 구호가 터져나왔다. 하지만 지금은 ‘농가 소득 증대를 위하여’가 많다. 직원들끼리 사진을 찍을 때도 ‘화이팅!’ 같은 구호 대신 다섯 손가락을 펼치며 ‘농가소득 5000만원!’을 외친다.”
취임 때 제시한 목표인데, 구체적 수치를 제시한 것이 신선하다.
"직원들과 6개월 동안 머리를 싸매고 2020년까지 농가소득 5000만원을 달성하기 위한 100대 요소를 만들었다. 올해 총농가소득 1조3000억원, 내년 1조6000억원이 목표다. 처음엔 다들 비웃었지만 지난해 제주도가 5000만원을 달성했고, 올해 경기도가 목표에 이를 것으로 예상한다. (올해 5월 현재 통계청 발표 농가소득은 4207만원이다.)”
직원들이 무리하다고 하지 않나.
“직원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나선다. 직원들 아이디어로 이전소득을 높이기 위해 5% 금리의 예금 상품을 만들었다. 태양광도 그런 아이디어 중 하나다. 농사를 지어봐야 수익이 안 나는 부지에 태양광 설비를 설치하는 것이다. 고추를 심으면 1년에 250만원밖에 매출이 안 나오는 한계농지 400평에 태양광을 설치하면 1년에 1200만원의 수익을 올릴 수 있다. 농가소득 5000만원이란 목표가 없었다면 그런 발상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농업인행복콜센터, 노인 11만 명 상담

베이스캠프를 해발 2000m에서 6000m로 올렸더니 에베레스트 등정 성공률이 치솟았다는 베이스캠프론이 그것인가.
“그렇다. 나는 베이스캠프를 5000만원에 세운 것이다. 내일을 예상하지 못하고 막연히 농사를 짓다가 이제는 5000만원 이상의 소득으로 잘사는 시대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것이다.”
직원들의 의식변화도 있나.
“지난 4월 고성에서 산불이 났을 때 달려갔더니 직원들이 벌써 수련원을 이재민에게 개방하고, 보험금도 50%를 선지급하는 등 조치를 해놨더라. 나도 행정안전부 장관이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걸 듣고 알았다. 올해 태풍이 세 번이나 왔는데 그때마다 직원들이 발벗고 나섰다. 예전 같으면 아침에 일손 도우러 가서 한두 시간 보내다 점심 먹고 2시쯤 사진 찍고 돌아왔을 텐데 말이다.”
다른 성과가 있다면.
“사회복지도 신경을 썼다. 70세 이상 독거노인이 전국에 80만 명이다. 이들을 돕기 위해 농업인행복콜센터를 만들었다. 현재 직원 20명이 11만 명의 노인을 상담하고 있다. 이들은 날마다 노인들에게 전화를 건다. 말상대가 돼주기도 하고 무엇이 고장 났다는 등의 고충을 듣는다. 그러면 100만원 범위 내에서 무상지원을 해준다. 앞으로 직원을 30명으로 늘리려고 한다. 그러면 30만 명의 노인을 돌보는 게 가능해진다.”
농업의 미래인 청년도 중요할 텐데.
“당연히 청년 농부를 위한 사업도 한다. 오는 16일에 경기도 안성에서 청년농부 사관학교가 문을 연다. 600억원 정도를 들여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등 4차산업을 융복합한 미래농업교육을 한다. 연 500명씩 졸업생을 배출해 농촌에 둥지를 틀게 할 계획이다. 현재 3기까지 모집해 시범교육을 했다.”
임기가 얼마 안 남았는데 앞으로 계획은.
“농협은 농업정책의 영역 안에서 운영된다. 그런데 정책의 유연성이 문제가 될 때가 있다. 그 문제는 농협중앙회장이 다룰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농업에 관한 40여 년의 경험을 바탕으로 보다 나은 농업정책을 수립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는 길을 찾아 노력하겠다.”

이훈범 대기자/중앙콘텐트랩 cielble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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