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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이재의 이코노믹스

공유경제의 거대 실험장 되면서 글로벌 자본 몰려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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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동남아국가연합의 고속 성장 비결

자카르타 에서 그랩 운전자가 승객에게 헬멧을 주고 있다. 그랩은 말레이시아에서 시작해 동남아 전역을 휩쓸고 있다. [AP=연합뉴스]

자카르타 에서 그랩 운전자가 승객에게 헬멧을 주고 있다. 그랩은 말레이시아에서 시작해 동남아 전역을 휩쓸고 있다. [AP=연합뉴스]

21세기 디지털 기술 혁명의 물결은 선진국보다 오히려 환경이 열악한 신흥국에서 더 거세다. 이미 발전이 많이 돼 편리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 한국이나 미국보다 인도네시아·미얀마 같은 신흥국에서 기술 혁신의 효과가 더 확실하게 체감된다. 각국 정상들이 어제부터 부산에서 정상회담을 열고 있는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ASEAN)은 세계에서 가장 활발한 모바일 인터넷 사용자를 보유한 시장이다. ‘없는 게 오히려 메리트’가 되는 4차 산업혁명의 역설이다. 스마트폰으로 거의 모든 상품을 구매할 수 있게 되면서 나타난 변화다. 늘 서구 선진국만 바라보고 그들의 성공모델을 따라 했던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새로운 환경이 펼쳐지고 있다.

인구 젊고 6억5000만명 거대 시장 #플랫폼경제의 최대 격전지로 부상 #‘없는 게 오히려 장점’ 되는 역설 #미국·중국·일본 앞다퉈 자본 투자

플랫폼 경제에서는 업종이 달라도 상생할 수 있는 파트너와 협업해 디지털 영토를 확장하는 전략이 중요하다. 우리는 4차 산업혁명의 파트너로 주로 미국의 실리콘밸리만 주목한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아세안의 디지털 혁신을 눈여겨봐야 한다. 6억5000만 명에 달하는 아세안 인구의 70%가 40세 이하의 젊은 인구다. 국내총생산(GDP)은 2조9863억 달러에 달한다. 아세안의 인터넷 경제가 매년 20~30%씩 성장한 결과다.

아세안의 다른 이름은 동남아다. 지금 동남아에서는 스마트폰 하나로 모든 게 다 되는 디지털 혁명이 눈부시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거대한 공유경제의 실험장이 되면서다. 인터넷 사용자는 전체 인구의 절반이 넘는 3억6000만명에 육박한다. 공간 혁명은 동남아 승차공유 사업에서 시작한 모빌리티 기업이 주도하고, 시간 혁명은 페이스북을 비롯한 플랫폼 기업과 온라인 상거래·미디어 기업이 주도한다.

우선 동남아 길거리 풍경을 확 바꾼 공간 혁명은 관광객의 눈에도 쉽게 포착된다. 말레이시아에서 시작해 동남아 곳곳으로 진출한 그랩이 대표적이다. 대중교통이 불편했던 동남아 대도시에서 디지털 혁신을 일으키며 급성장해 동남아 최초의 유니콘(기업가치 10억 달러 이상 스타트업)이 됐다. 현지 사정을 고려한 지역별 맞춤 전략으로 급성장해 온 그랩은 2014년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의 전격 투자를 받아 덩치를 키웠다.

이제 그랩은 단순 차량 공유서비스를 넘어 자율주행과 연계한 모빌리티 기술 기업을 지향한다. 사실 우버·디디추싱·그랩 같은 승차공유 기업들의 진짜 가치는 빅데이터에 있다. 승차공유 서비스 과정에서 생성되는 다양한 공간 정보와 소비자 취향을 알려주는 빅데이터는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4차 산업혁명의 핵심 원료다. 깊게 배우기(deep-learning)가 가능한 인공지능은 다양한 빅데이터를 먹고 자란다. 그랩 운전자와 이용객이 동남아 전역을 다니며 매일 만들어내는 막대한 양의 빅데이터 활용 가치는 무궁무진하다. 도요타·현대차 같은 자동차 기업이 그랩에 투자하고, 그랩의 디지털 지도 사업에 SK가 참여한 배경이다.

고젝 은 승차공유는 물론 고페이(GoPay)로 발전해 동남아 모바일 결제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고젝 은 승차공유는 물론 고페이(GoPay)로 발전해 동남아 모바일 결제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온라인 상거래와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산업도 폭풍 성장하고 있다. “우리의 경쟁 상대는 수면시간”이라고 했던 넷플릭스 경영자의 통찰이 동남아만큼 맞아떨어지는 곳이 없다. 태국의 인터넷 사용자는 하루 5시간 이상, 인도네시아는 4시간으로 세계 평균 3시간 13분보다 길다. 필리핀·말레이시아 역시 모바일 인터넷 사용 시간이 세계 10위권에 든다. 차가 막힐수록, 약속 시간을 잘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디지털 시장 규모는 커진다.

동남아 지역의 인터넷·모바일 경제 규모는 2019년 현재 1000억 달러 규모에서 2025년 1970억 달러로 성장할 전망이다. 갈수록 글로벌 벤처 자본이 유입되며 동남아 전자 상거래 시장 규모도 팽창하고 있다. 중국의 알리바바, 영국의 테스코, 싱가포르의 테마섹이 투자한 ‘라자다’와 중국의 텐센트가 투자한 ‘쇼피’가 동남아 시장을 놓고 뜨겁게 격돌하고 있다.

특히 인도네시아의 성장이 주목된다. 그동안 인도네시아는 세계 4위 인구 대국에 면적은 한반도 9배에 달해 잠재력은 높지만, 지역별 격차가 커 외국 기업이 접근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재선에 성공한 조코위 대통령의 인프라 확장 정책으로 정보통신·물류 혁명이 가속도가 붙으면서 아세안의 성장을 견인하는 인구 2억6000만의 거대 디지털 제국으로 거듭나고 있다.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현재 약 400억 달러로 추정되는 인도네시아의 인터넷 경제는 2015년 대비 연평균 49%의 성장률로 4년 동안 4배 이상 급성장했다. 동남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빠르게 성장하는 인도네시아는 2025년이 되면 인터넷 경제 규모가 1300억 달러를 훌쩍 넘길 곳으로 예상된다. 특히 전자상거래 시장은 올해 210억 달러에서 2025년 820억 달러로 급증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무엇보다 수도 자카르타는 글로벌 벤처 자본이 몰려드는 플랫폼 격전지로 급부상했다. 실제로 2016년 고젝을 시작으로 폭죽처럼 연달아 탄생한 인도네시아의 유니콘 기업들은 글로벌 자본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 토코피디아·트래블로카·부칼라팍 등은 그동안 시장경제에서 소외됐던 서민 계층을 끌어안으면서 성장해 인도네시아의 디지털 혁신을 주도하고 있다.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너무나 단순한 사업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동남아 스타트업에 글로벌 벤처 자본이 몰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당장의 수익에 연연하기보다는 기업의 미래가치 때문이다. 장기적 안목으로 플랫폼 시장을 선점하고 점유율을 높인 뒤 훗날 사업 영역의 확장을 도모하는 전략이다. 고젝은 차량 공유 서비스뿐 아니라 마사지·음식배달·의료 서비스·핀테크 등 경계를 넘어 무한 확장 중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생산성 향상은 첨단 기술 개발뿐 아니라 이질적인 세계를 연결하고 융합하는 능력에서 이뤄진다. 영토 정복, 식민지 확장을 최우선으로 했던 제국주의 패러다임을 넘어 상생과 공존을 위한 협력의 필요성을 시사한다. 개인·기업·국가 모두 국경과 통계 수치에 갇힌 사고에서 벗어난 지리적 상상력 발휘도 필요하다. 그동안 우리는 서구 선진국의 중심지만 주목했지만, 이제는 우리의 자본과 기술을 적용할 수 있는 미개척지 동남아에 관심을 가질 때다. 특히 동남아는 한국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 줄 수 있는 매력적인 파트너가 될 가능성이 크다.

차이나 리스크를 극복할 ‘기회의 땅’ 동남아

중국에 집중됐던 국내 제조업체의 해외 직접 투자가 2011년 이후 아세안 10개국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2018년 아세안에 새 공장을 세운 한국 제조업체는 523개였고, 중국에선 238개로 두 배 이상 차이가 났다. 중국에서 인건비가 급격히 오르고 외국 기업에 대한 혜택이 대폭 축소되자 한국 기업들이 아세안으로 눈을 돌린 결과다. ‘사드’ 갈등에 따른 경제 보복, 미·중 무역갈등, 홍콩 사태 등으로 투자 리스크가 계속 커지자 아세안 국가들이 중국을 대신할 ‘기회의 땅’으로 떠올랐다는 얘기다.

높은 성장률과 젊은 시장, 파격적인 투자 인센티브와 함께 낮은 인건비는 매력적인 조건이다. 아세안 국가 중에서 한국 기업의 베트남 집중 현상이 뚜렷하다. 2009년 베트남에 새로 설립한 한국 기업은 17개에 불과했지만 2018년엔 415개로 10년 동안 약 24배, 투자금액은 3900만 달러에서 19억5300만 달러로 약 50배 늘었다. 외국 기업 유치에 적극적인 베트남 정부는 일반 기업의 외국인 투자 한도를 철폐했다. 특히 첨단기술을 보유한 기업에 대해서는 4년간 법인세 면제 혜택(이후 9년간 50% 감면)을 제시하고 있다.

한국 정부 역시 26일까지 부산에서 열리는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를 계기로 국내 기업들에 아세안 10개국 전체로 관심을 넓힐 것을 권하고 있다. 이 회의에서는 ‘사람(People), 번영(Prosperity), 평화(Peace)’ 등 3P 분야별 미래 협력 방향이 담긴 ‘한·아세안 공동비전 성명’과 함께 ‘한강·메콩강 선언’을 채택한다. 이에 맞춰 국내 기업들은 성장성 높은 신사업을 발굴해야 한다. 빈틈없는 계획과 차질 없는 실행을 기대한다.

김이재 경인교대 지리학과 교수·지리적 상상력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