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름값 뛸 때 달러 챙기자" 국유화 바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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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민족주의 바람이 전 세계 자원 보유국에서 거세게 불고 있다. 남미, 중앙아시아 카스피해 연안, 아프리카 할 것 없이 자원 보유국들에서 잇따라 유전과 광산을 국가가 환수하고 있다. 남미 베네수엘라는 올 1월 외국 기업이 갖고 있던 유전 32곳을 국유화했다.

기존 계약을 백지화하고 베네수엘라 정부가 지분 60% 이상을 갖는 새로운 계약을 했다. 아프리카 앙골라는 유전 지분의 51%를 국영 석유회사 소낭골이 보유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2014년까지 국내의 기업들이 가진 광산 채굴권을 정부가 거둬들일 방침이다. 이에 앞서 러시아도 2000년대 초반 원유.가스와 송유관 운영 사업을 국유화했다.

외국 기업의 지분을 환수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유전 탐사나 생산권을 외국 기업에 줄 때 대가로 받는, 이른바 '사이닝(signing) 보너스'도 천정부지로 뛰었다. 유전 규모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4~5년 전만 해도 대체로 100만 달러 내외였던 사이닝 보너스가 이젠 1억 달러를 넘나든다.

카자흐스탄의 경우 외국 기업이 석유를 해외로 내갈 때는 수출 가격의 33%를 세금으로 내야 한다. 그럼에도 세계 각국은 카스피해에서 유전 개발에 열중하고 있다. 사이닝 보너스, 고율의 세금까지 모두 줘도 요즘 같은 고유가 시대에 유전 개발은 여전히 수지맞는 장사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자원민족주의의 목표는 단 하나다. 자원을 통해 그들의 국익을 극대화해 기간산업을 발전시키겠다는 것이다. 우선 국가가 유전이나 광산의 지분을 많이 갖고 있으면 그만큼 이익 배분이 크다. 자원 보유국들은 대체로 이를 다른 분야 산업을 육성하는 데 투자한다. 국제 원자재 시세가 떨어질 때나 자원이 고갈됐을 때에 대비해 신성장 동력을 마련하려는 것이다. 때론 자원을 무기로 활용하기도 한다.

러시아는 올해 초 우크라이나에 한동안 천연가스 공급을 중단했다. 표면적으론 가격 인상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국제사회에선 친서방 노선을 표방했던 우크라이나 정권에 대해 러시아가 강력한 경고와 제재를 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자원민족주의는 일찌감치 1970년대 초반 중동에서 시작됐다. 당시 중동의 유전은 미국과 유럽의 거대 에너지 기업들이 운영하고 원유 가격도 그들이 정했다. 당시는 미국 등 서방 세계가 중동산 원유의 대부분을 수입했다. 서방 국적의 석유 회사들은 자국의 이익을 생각해 원유를 싼값에 내다 팔았다. 이에 반발해 중동 국가들은 유전과 석유를 국유화하고 값을 올렸다.

최근의 자원민족주의는 원자재 가격 인상을 부채질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또 자원 보유국의 지분이 늘어나면서 외국 기업이 차지할 지분은 줄어들고 있다. 우리나라가 비집고 들어설 틈이 갈수록 좁아지고 있는 것이다.

자원민족주의 흐름이 한국엔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일부 외국 기업이 국유화에 반발해 재계약 하지 않고 유전을 포기하는 빈틈을 노릴 수 있다는 것이다. 베네수엘라에서는 미국 엑손모빌이 일부 유전에 대해 국유화 계약을 하지 않자 스페인의 렙솔이 이를 차지한 사례가 있다. 자원민족주의를 내세우는 나라에서는 시장 논리보다 정부의 뜻에 따라 유전.광산의 주인이 결정된다는 점도 한국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단순입찰 경쟁에서는 엄청난 자금력을 지닌 거대 국가나 기업을 제치기 힘들지만 자원민족주의 국가에서는 외교적으로 인맥 관리를 잘하면 자원을 확보할 가능성이 크다는 논리다. 경희대 아태국제대학원 곽재성 교수는 "무엇보다 정부 고위층이 자원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국가의 집권층 안에 탄탄한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 아프리카=권혁주 기자, 중남미=서경호 기자, 유럽.중앙아시아=심재우 기자,

캐나다=임미진 기자(이상 경제부문), 호주=조민근 기자(국제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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