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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요양원 등 가정 외 가습기 살균제 노출 피해도 조사해야"

중앙일보

입력

지난달 27일 서울시청 다목적홀에서 열린 2019 가습기살균제참사 진상규명 청문회에서 가습기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이 나와 모두 진술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27일 서울시청 다목적홀에서 열린 2019 가습기살균제참사 진상규명 청문회에서 가습기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이 나와 모두 진술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2007년 3월 당시 70대였던 남성 A 씨가 폐 섬유화 증상으로 사망했다. 폐 섬유화는 가습기 살균제에 노출됐을 때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이다.
그는 2006년 10~11월 폐 질환과는 무관한 질환으로 B 병원 1인실에 입원했다. A 씨는 입원 전 건강검진 때 폐가 건강했다는 답변을 들었지만, 퇴원 후에는 체중감소와 각혈 증세를 보인 끝에 사망했다.
입원 당시 병상 위 테이블에는 가습기가 있었고, A 씨는 입원 당시 가습기를 온종일 틀어놓았다. 그는 병원 측이 살균제를 아침, 저녁으로 하루 2번 투입하는 것을 목격했다.

2011년 1월 또 다른 70대 남성 C 씨는 D 종합병원 6인실에 입원했는데, 얼마 후 호흡곤란으로 사망했다.
병실 선반에 가습기 살균제가 있었고, 아침마다 간호사가 살균제를 넣는 것을 목격했다.
피해자는 가습기에서 멀리 떨어진 병상에서 치료를 받고 회복 중이었으나, 가습기 옆 병상으로 옮기면서부터 증상이 악화해 사망했다.

이처럼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가운데 병원과 요양원, 산후조리원 등 가정 외 다중이용시설에서 살균제에 노출된 피해자가 적지 않지만, 살균제 피해가 처음 공개된 지 8년이 지나도록 이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살균제 노출 현황 파악의 사각지대

지난달 27일 서울 중구 서울시청에서 열린 '가습기살균제참사 진상규명 청문회'에서 문제가 된 가습기살균제 제품이 놓여 있다. [뉴스1]

지난달 27일 서울 중구 서울시청에서 열린 '가습기살균제참사 진상규명 청문회'에서 문제가 된 가습기살균제 제품이 놓여 있다. [뉴스1]

가천대 의과대학 예방의학교실 최윤형 교수팀은 2일 한국환경보건학회지에 게재한 '병원에서의 가습기 살균제 노출 사례 연구: 4차 가습기 살균제 피해 신청자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에서 병원에서 살균제에 노출돼 피해를 본 사례를 구체적으로 소개했다.

이를 위해 연구팀은 2016년 9월부터 지난해 5월까지 한국환경산업기술원에 살균제 피해 구제 신청을 하고, 살균제와 폐 질환의 인과관계 규명 조사에 참여한 피해 신청인 총 4393명의 피해 내용을 분석했다.

이 중 병원에서 살균제에 노출된 피해자는 301명으로 전체의 6.9%를 차지했다.
같은 환자가 2곳 이상의 병원에서 노출된 경우를 고려하면 노출 사례는 총 392건이었다.

노출 사례 중 48건(12.2%)은 살균제를 '병원에서 제공'했고, 100건(25.5%)은 '병원 제공 추정', 234건(59.7%)은 병원 매점이나 슈퍼 등 일반 판매점에서 '피해자 측이 개별 구매'했으며, 10건(2.6%)은 ‘알 수 없음’으로 분석됐다.

2016년 보건복지부도 진상 규명 조사 보고서에서 2006~2011년에 8개 병원에서 1223개의 살균제를 사용했다고 보고한 바 있다.

연구팀은 "병원에서 살균제에 노출된 피해자의 경우 살균제를 직접 구매하지 않았기 때문에 피해 사실을 증명하는 데 어려움이 있어 살균제 피해 구제 신고와 노출 현황 파악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고 지적했다.

연구팀은 또 "병원에서 살균제에 노출된 국민의 실질적인 피해 규모가 상당히 클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이들을 대상으로 한 더욱 자세한 역학 조사가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고 덧붙였다.

특히, 병원에서 사용한 가습기 살균제 제품명과 사용 기간, 살균제 사용 당시 입원한 피해자 명단을 공유하는 등 피해 사실 입증에 병원이나 정부가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습기 살균제 개발과 판매 과정 [자료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

가습기 살균제 개발과 판매 과정 [자료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

가습기 살균제는 가습기에 사용되는 물에 첨가해 미생물의 번식과 물 때 발생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1994년 최초로 출시됐다.

출시 이후 2011년까지 약 20여 종이 넘는 제품이 연간 60여만 개가량 판매된 것으로 보고됐다.

한국환경산업기술원에 따르면 살균제로 인해 건강 피해를 받았다고 신고한 피해자는 2011년부터 지난 7월 19일까지 총 6476명이다.

21세기식 환경보건 문제

한국환경보건학회지 8월호 표지 [자료 한국환경보건학회]

한국환경보건학회지 8월호 표지 [자료 한국환경보건학회]

한편, 한국환경보건학회는 학회지 8월호를 가습기 살균제 사건과 관련한 특집호로 발간했다.
이번 특집호는 살균제 관련 논문과 소고(小考)로 구성해 현재 진행 중인 살균제의 노출, 건강 피해 등을 다루고 있다.

특집호에서는 '가습기 살균제 사건과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 소속 최예용·이인현 박사는 '가습기 살균제 참사와 미나마타병 사건의 비교 고찰'이란 논문을 통해 일본 미나마타 수은 중독사고와 살균제 사고를 비교했다.

논문에서는 "미나마타병은 공장폐수로 바다와 강이 오염되고 어패류를 통해 오염물질이 인체에 영향을 준 20세기식 환경보건 문제이고, 가습기 살균제 참사는 가정과 사무실, 다중이용시설 등에서 사용하는 전자기기 가습기와 관련된 생활화학 위생제품의 소비과정에서 발생한 21세기식 환경보건 문제"라고 규정했다.

특조위 부위원장인 최 박사 등은 "미나마타병은 일본에서만 발생한 사건이지만 대표적인 공해병 사건으로 세계에 알려졌고 지구촌 곳곳의 수은 중독문제에 대한 관심을 촉발했고, 유엔 차원의 국제수은협약으로 이어졌지만 가습기 살균제 참사는 국내에서만 이슈화되고 국제적인 관심을 끌어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강찬수 환경전문기자  kang.chans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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