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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정 붕괴, 무리한 경제개혁이 화근이었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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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9호 20면

책 속으로

폭풍 전의 폭풍

폭풍 전의 폭풍

폭풍 전의 폭풍
마이크 덩컨 지음
이은주 옮김
교유서가

민중 지지 얻은 그라쿠스 형제 #대농장 해체하려다 암살당해 #강대국 지위가 정치 문란 불러 #공화정 450년 분열의 서막

“집정관 권한대행 푸블리우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카르타고의 성벽 앞에 서서 불타는 시가지를 바라보았다.”

부제가 ‘로마 공화정 몰락의 서막’인 이 책은 아이로니컬하게도 공화정의 절정기인 기원전 146년에서 시작한다. 숙적 카르타고와 120년에 걸쳐 3차에 걸쳐 벌였던 포에니 전쟁에서 마침내 승리한 순간이다. 로마는 패배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카르타고 생존자 5만여 명을 노예로 팔고 도시를 17일간 불태웠으며 그 터에 소금까지 뿌려 풀 한 포기 날 수 없도록 말살하면서 사디즘적으로 승리를 만끽했다. 기원전 510년 왕정을 폐지하고 시작했던 로마 공화정은 바로 이 해에 절정에 이르렀다. 같은 해 로마는 코린토스의 반란을 진압하고 마케도니아를 속주로 편입하면서 그리스 대부분을 지배하게 됐다. 로마는 지중해 세계에서 유일 강대국의 지위를 차지했다.

문명이나 국가가 몰락에 이르게 된 단초는 흔히 최전성기에 잉태된다. 미국의 대중 역사저술가인 지은이는 로마 공화정은 바로 정복 전쟁의 성공으로 누리게 된 정치적·경제적 번영 때문에 몰락의 길에 접어들게 됐다고 지적한다. 하나씩 복기해보자.

문제의 근원은 450년간 계속됐던 로마 공화정의 역사가 분열로 점철됐다는 점이다. 파트라키로 불린 귀족 계급은 부와 권력을 바탕으로 권력기관인 원로원과 최고 공직자인 집정관을 독점했다. 플레브스로 불린 평민은 2등 시민이나 다름없었지만 민회를 통해 국사에 참여했고, 충실한 병역 복무로 발언권을 높여갔다. 평민만 맡을 수 있는 호민관이란 공직으로 권리를 지켰다.

로마의 대농장 라티푼디움을 해체하는 경제민주화 정책을 도입하려다 실패한 그라쿠스 형제. 로마의 번영이 흔들리는 단초를 제공했다.

로마의 대농장 라티푼디움을 해체하는 경제민주화 정책을 도입하려다 실패한 그라쿠스 형제. 로마의 번영이 흔들리는 단초를 제공했다.

신분 간 세력 균형은 역설적으로 로마가 지중해의 강자로 떠오르고 경제 번영을 누리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사건이 기원전 133년 호민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추진한 ‘경제민주화’ 정책이다. 토지가 경제의 중심이던 로마에서 당시 시대 과제는 만연한 ‘라티푼디움’의 해소였다. 승전 이후 유력자들이 정복지 등의 토지를 과점하고 대농장을 만든 다음 노예를 들여와 경작하는 농업 방식이다. 이 때문에 평민의 중추인 소농들은 경제적으로 직격탄을 맞았다. 노예들이 대량 생산한 곡물과 가격에서 경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로마판 ‘경제양극화’다.

그러자 민중의 인기를 업은 그라쿠스는 토지 재분배 법안을 원로원에 자문하지 않고 곧바로 민회에서 통과했다. 그 결과는 기원전 132년 공화정 사상 최초로 벌어진 ‘피의 암살’이었다. 동생인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개혁을 이어나갔으나 기원전 121년 역시 암살당했다.

로마의 ‘계급투쟁’은 ‘고귀한 영혼’으로 불린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으로 끝나지 않았다. 기원전 87년에는 평민파인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귀족파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내전을 벌였다. 마리우스가 일시 승리를 거두면서 술라파는 살해되거나 피신해야 했다. 승리자는 패배자의 재산을 몰수해 세력을 굳히는 정치자금으로 사용했다.

기원전 82년 술라파가 로마에 진군해 마리우스파를 몰아내면서 사정은 정반대가 됐다. 귀환자들은 권력과 재산을 도로 찾은 데 만족하지 않았다. 마리우스와 후임 집정관인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정권에서 일한 공직자들의 공권을 박탈하고 처형했다. 과거 정권의 ‘인종청소’를 노린 증오와 광란의 공포정치다. 최소한 원로원 의원 100명과 기사 1000명을 포함한 3000명이 공권박탈 조치로 죽음을 당했다.

그 과정에서 나온 엄청난 몰수자산은 술라파의 전리품이 됐다. 더 많이 숙청할수록 더 많은 재산이 손에 떨어졌다. 술라파는 피와 금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실현했고, 정치권력을 차지했으며, 복수와 축재를 동시에 이뤘다. 로마 사상 최고 부자로 통하는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이런 방식으로 재산을 모았다. 크라수스는 이렇게 축적한 재산을 바탕으로 나중에 가이우스 폼페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제1차 3두 정치의 문을 열었다. 카이사르의 조카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 투르니우스는 로마 공화정을 끝내고 제정의 문을 열었다. 초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바로 그다. 군사·경제적 성공으로 문란해진 로마 공화정은 그렇게 무너졌다. 로마인들은 그때까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제정을 시작해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로마 공화정의 전쟁 승리는 필연적으로 놀라운 사회 변화를 가져왔다. 경제적 불평등의 증가와 전통적 생활방식으로부터 이탈하게 된 것을 비롯해 정치적 양극화의 심화, 정치 행위의 불문율 와해, 군대 사유화, 부정부패 횡행 등이 잇따랐다. 내부적으로는 끈질긴 사회적·민족적 편견, 시민권과 선거권 확보를 둘러싼 싸움이 계속됐으며 폭력이 정치 도구화했다. 지은이는 특권에 집착한 나머지 시스템을 제때 개혁하지 않은 엘리트 집단도 몰락에 기여했다고 지적한다.

로마 공화정의 몰락 과정은 로마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현재의 여러 나라 이야기로도 들린다. 그만큼 로마 역사가 현재성이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지은이는 역사는 그렇게 단순하게 반복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수많은 요인이 얽히고설켜 전개된다는 이야기다. 역사가 현재에 가르침을 주는 힘은 결과를 이끌어낸 원인을 찾아 교훈으로 삼는 데 있다는 지은이의 지적이 울림을 준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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