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향 지음, 에크리, 535쪽, 2만3000원
우리가 골수까지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거죽도 제대로 모르는 나라가 한둘이 아니다. '으레 그럴 것'이라는 예단과 '원래 그랬다'는 고정 관념에 빠져 실체를 파악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했다는 반성의 소리다.
그런 의미에서 영국의 문화와 정신을 파고든 이 책의 '한 나라와 그 국민 읽기'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지은이는 영국과 그 국민을 가로세로로 정밀하게 살피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잉글랜드적인 것(englishness), 영국적인 것(britishness)이란 어떤 것인가를 깊숙이 파고든다.
이는 1990년대 영국 인문.사회 과학계의 화두였다. 80년대 경쟁에서 뒤진 전통 굴뚝산업의 상당수를 잃은 뒤 문화.지식 산업으로 나라를 새롭게 추스르면서 나온 물음이다.
이에 답하기 위해 살펴본 영국의 모습은 어떤가. 그것은 한마디로 대단한 모순과 아이러니투성이다.
산업혁명으로 어느 나라보다 먼저 자본주의를 이뤘음에도 칼 마르크스가 공산주의의 토대가 된 자본론을 집필한 곳이 이 나라다. 2차대전 뒤 미국과 손잡고 '철의 장막' 건너 소련과 맞선 나라인데도 존 필비를 비롯한 특권층이 자진해서 소련 스파이로 활동했다.
그렇다면 이런 모순의 나라가 어떻게 19세기 세계 최강국으로 군림했고 지금은 새로운 문화.지식의 주도 국가로 자리 잡고 있는가? 과거 괴테는 '실용주의야말로 이 세상에서 잉글랜드인이 우위에 오르게 된 비결'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무뚝뚝한 영국인은 놀이나 말보다 근면과 실용을 중시한다.
여기에 지은이는 중요한 개념을 하나 더 찾아낸다. 영국의 번영은 지도자가 국민에게 복종과 인내를 강요함으로써 얻은 게 아니라 자유로운 창의력을 촉진함으로써 얻었다는 지적이다. 문화 국가는 결코 강요로 만들 수 없다는 교훈이다. 전체 서술이 자세하면서도 이야기가 흥미로워 쉽게 빨려드는 역작이다. 지은이는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다.
채인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