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깊이읽기] 영국의 힘 ! 실용·창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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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영국적인, 너무나 영국적인
박지향 지음, 에크리, 535쪽, 2만3000원

우리가 골수까지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거죽도 제대로 모르는 나라가 한둘이 아니다. '으레 그럴 것'이라는 예단과 '원래 그랬다'는 고정 관념에 빠져 실체를 파악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했다는 반성의 소리다.

그런 의미에서 영국의 문화와 정신을 파고든 이 책의 '한 나라와 그 국민 읽기'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지은이는 영국과 그 국민을 가로세로로 정밀하게 살피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잉글랜드적인 것(englishness), 영국적인 것(britishness)이란 어떤 것인가를 깊숙이 파고든다.

이는 1990년대 영국 인문.사회 과학계의 화두였다. 80년대 경쟁에서 뒤진 전통 굴뚝산업의 상당수를 잃은 뒤 문화.지식 산업으로 나라를 새롭게 추스르면서 나온 물음이다.

이에 답하기 위해 살펴본 영국의 모습은 어떤가. 그것은 한마디로 대단한 모순과 아이러니투성이다.

산업혁명으로 어느 나라보다 먼저 자본주의를 이뤘음에도 칼 마르크스가 공산주의의 토대가 된 자본론을 집필한 곳이 이 나라다. 2차대전 뒤 미국과 손잡고 '철의 장막' 건너 소련과 맞선 나라인데도 존 필비를 비롯한 특권층이 자진해서 소련 스파이로 활동했다.

근대 민주주의와 정당 제도의 세계적인 모범 국가인데도 명목상 군주가 있다. 옥스브리지(옥스퍼드와 캠브리지 대학)로 대표되는 엘리트.능력주의 교육의 산실이면서도 평등 교육의 목소리가 전세계 어디보다 높다. 축구.테니스.골프.럭비.승마.크리켓 등 근대 스포츠와 페어플레이 정신이 태어난 곳이건만 '경기장의 망나니'인 훌리건이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모순의 나라가 어떻게 19세기 세계 최강국으로 군림했고 지금은 새로운 문화.지식의 주도 국가로 자리 잡고 있는가? 과거 괴테는 '실용주의야말로 이 세상에서 잉글랜드인이 우위에 오르게 된 비결'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무뚝뚝한 영국인은 놀이나 말보다 근면과 실용을 중시한다.

여기에 지은이는 중요한 개념을 하나 더 찾아낸다. 영국의 번영은 지도자가 국민에게 복종과 인내를 강요함으로써 얻은 게 아니라 자유로운 창의력을 촉진함으로써 얻었다는 지적이다. 문화 국가는 결코 강요로 만들 수 없다는 교훈이다. 전체 서술이 자세하면서도 이야기가 흥미로워 쉽게 빨려드는 역작이다. 지은이는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다.

채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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