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본령으로 돌아 오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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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정상적 사회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정치권의 기능 상실상태가 너무 오래 계속되고 있다. 지난 3월이래 국회와 정당들은 잇단 밀입북의 충격이 조성한 공안정국과 영등포 을 재선거에 밀려 국회다운 국회, 정치다운 정치를 전혀 보여주지 못한 채 정치실종, 정국표류를 계속하고 있다.
영등포 재선거가 끝난 후 여야간에는 대화재개 움직임이 있다고 하지만 어느 정당도 아직은 뚜렷한 정국타개방안을 갖고 적극적으로 대화에 나서는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더욱이 김대중 평민당총재에 대한 검찰소환, 평민당 측의 부평집회 강행 등이 예정돼 있어 공안정국은 여전히 계속되고 정치기능의 회복은 아직도 멀었다는 느낌이다.
나라가 태평성대라서 만사가 예정대로 착착 진행되는 상황이라면 굳이 정치판을 벌일 필요도 없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처한 형편은 정치가 이토록 오랜 기간 아무 것도 못한 채 불안과 갈등의 증폭 요인만 양산하는 현상을 견딜 수 없게 한다.
사회는 대형범죄로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고 경제는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민생은 불안하고 전체사회가 뭔가 돌파구를 요구하고 있다. 이런 요구는 정치가 충족시키지 못하면 누가 할 것인가. 게다가 당장 정기국회도 임박했다. 정기국회에서 시급히 처리해야 할 각종 입법과제들이 산적해있고 정치권의 논의→절충→결론 등 기다리는 수많은 현안들이 쌓여있다.
당장 개학을 맞은 전교조문제가 발등의 불로 우리 앞을 가로막고있고 오래 끌어온 5공 청산문제도 이젠 어떤 형태로든 결말을 내야할 형편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경제질서의 대담한 개혁을 뜻하는 토지공개념의 법제화문제도 정치권에서 벌써 오래 전부터 활발한 연구와 토론과 여론수렴의 모습을 보이고 있어야 할 문제다. 영등포재선거에서 더욱 절감하게 된 국회의원선거법 개정문제도 다음 선거가 임박할 때까지 미룰게 아니라 이번 정기국회에서 결론을 내는 게 옳다.
이처럼 따져보면 정치권이 할 일은 일일이 다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고 그 중에는 하루를 다투는 시급한 문제들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정치권은 오랜 낙백상태에서 언제 깨어날지 모를 판이다. 우리는 정치권의 이런 무기력·무능에 대한 국민의 실망이 짜증으로 변하고 마침내 불신·혐오·경멸로 급속도로 번져 가는 두려운 현상을 실감하고 있다.
더 이상 정치권은 머뭇거리지 말고 서둘러 각자 정국타개 방안을 마련하고 대화와 절충에 나서야한다.
공안 사건이 정치 포기의 핑계가 될 수 없는 만큼 여야는 모두 사건처리와는 별개로 다시 정치의 테이블로 돌아오는 게 옳다. 우선 중진회담이라도 빨리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여기서 전교조 문제도 다루고 선거법·보안법을 위시한 각종 입법문제와 5공 청산문제 등 현안을 포괄적으로 협의해 나가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각 정당은 국정감사준비 등 정기국회에 대비한 각종 활동을 서둘러야 한다. 중요법안에 대해 여태 독자안도 준비 못한 정당들이 많은 줄 안다.
정치권이 이처럼 할 일을 한다는 나름대로의 노력을 보이고 거기서 하나씩 실적이 나와야 떨어질 대로 떨어진 대 국민 신용도 조금씩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시간은 많이 늦었다. 정치 재개에 공안사건이 영향을 미쳐서도 안되고 공안 사건 때문에 이런 정치의 회복을 팽개쳐서도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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