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데이 칼럼] 홍콩 ‘일국양제 실험’ 실용성 회복해야 지속가능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642호 29면

배영대 근현대사연구소장·철학박사

배영대 근현대사연구소장·철학박사

홍콩에 1년간 머문 적이 있다. 2008년 중반부터 홍콩대 방문학자 신분으로 그 사회 분위기를 좀 느껴볼 기회가 있었다. 당시 나는 좀 엉뚱하게도 노자 철학을 중국의 개혁개방, 홍콩의 일국양제(一國兩制·한 국가, 두 제도)와 연결해 생각해보곤 했다.

사회주의-자본주의 동거 22년 #덩샤오핑 당시 초심 되돌아볼 때 #일국과 양제 ‘절묘한 균형’ 필요

물처럼 부드러움을 숭상하는 노자 철학이 개혁개방이나 일국양제 같은 어려운 문제를 푸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중국에서 2000년 넘게 진행되어온 ‘노자 해석사’에서 좀 색다른 움직임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노자와 공자는 대개 대립적인 철학자로 해석되는 것이 그동안의 상식이었다. 그런데 중국에서 개혁개방이 본격화되는 1990년대 들어 노자와 공자 철학의 공통점을 중시하는 흐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2000년대 들어와선 중국철학사 서술에 반영되기까지 했다.

중국의 개혁개방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동거 가능성을 실험한 것이다. 그 실험을 국외로 확대한 것이 홍콩의 일국양제다. 개혁개방과 일국양제 둘 다 덩샤오핑이 주도했다. 이 세기적 실험을 뒷받침하는 철학은 흑묘백묘론으로 묘사되는 실용주의였다.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된다는 것이다.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우선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고 보자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의 극좌 노선(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이 잇따라 실패하며 피폐해진 민생을 추스르는 데 실용주의가 필요했다고 해도, 사회주의 체제에 자본주의 시스템을 도입하는 일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었다. 중국에서 개혁개방 이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중 한쪽을 더 중시하는 세력 간 다툼이 계속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개혁개방을 추진해나가기 위해서는 실용주의 노선의 성공 가능성을 뒷받침해줄 보다 강력한 ‘철학 공정(工程)’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선데이 칼럼 6/29

선데이 칼럼 6/29

노자와 공자의 철학은 보기에 따라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에 비유될 수 있을 만큼 거리가 떨어져 있다. 노자와 공자 철학이 그 원류에 있어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면, 개혁개방을 우려하는 사람들의 시각도 좀 더 유연해지지 않겠는가. 개혁개방을 추진하는 중국의 이론가들이 이러한 ‘철학 공정’을 구상했을 수도 있었겠다는 나의 가정인데, 이런 생각을 2008년 무렵 홍콩대 도서관에 앉아 해보았다는 얘기다.

홍콩은 1997년 7월 1일 영국에서 중국으로 반환됐다. 반환 22년을 맞는 지금의 시점에서 일국양제는 얼마나 성공적인가. 최근 홍콩의 대규모 시위는 일국양제의 지속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하게 한다. 730만 명의 홍콩 인구 중 200만 명(시위대 추산)이 거리로 나온 것은 예사로 볼 일이 아닌 것 같다. 매년 7월 1일 크고 작은 시위가 있었는데 내일모레는 어떤 식으로 진행될까.

실용주의에 기반을 둔 일국양제는 ‘일국’과 ‘양제’의 절묘한 균형 위에서만 지속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중국 정부는 ‘일국’을 강조하면서 홍콩을 하루라도 빨리 중국화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반면 홍콩인들은 ‘양제’를 중시하면서 홍콩에 더 많은 자치가 실현되기를 바란다. 최근 시위는 ‘범죄인 인도 법안’을 놓고 갈등이 불거졌지만 여기엔 깊은 뿌리가 놓여 있다. 중국 덩샤오핑과 영국 대처가 반환 협정에 사인할 때부터 잠복한 문제였다. “고도의 자치(a high degree of autonomy)”를 홍콩에 허용한다고 해놓았는데, 그 고도의 기준은 누가 어느 위치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다.

일국양제의 ‘불완전한 균형’은 중국의 파워가 세지면서 잠복한 모순이 부각되는 것 같다. 반환 이후 홍콩은 점점 힘을 잃어간다고 홍콩인들은 생각한다. 거기서 나오는 불안과 분노가 대규모 민주화 시위로 표출되고 있다.

일국과 양제의 균형을 불완전하나마 지속해나가는 길은 출발 당시의 실용성을 회복하는 것 아닐까. 초심으로 돌아가 보자는 얘기다. 22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이 강대국이 된 중국이 대국다운 아량을 발휘할 기회이기도 하다. 중국이 오늘만큼 크는 데 홍콩의 자본과 기술이 원동력이 되었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자칫 모두 빠질 수 있는 파국은 면해야 한다.

배영대 근현대사연구소장·철학박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