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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년 전 수세식 화장실, 백제 왕궁은 뭔가 달랐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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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2호 16면

[이훈범의 문명기행] 익산 왕궁리 유적

국보 289호인 왕궁리 5층석탑. 왕궁은 7세기 이후 사찰로 변모했지만 왕궁 건물을 최대한 활용했다. [박종근 기자]

국보 289호인 왕궁리 5층석탑. 왕궁은 7세기 이후 사찰로 변모했지만 왕궁 건물을 최대한 활용했다. [박종근 기자]

전북 익산의 왕궁리는 이름 그대로 왕궁 터다. 백제 30대 무왕(재위 600~641)이 품었던 왕성(王城)의 기운이 서렸다. 수도 사비(부여)의 말 많은 귀족세력을 견제하고 쇠락한 백제의 위상을 끌어올리기 위해 천도를 생각했던 걸까, 아니면 어린 시절 선화공주와 사랑을 나눴던 추억이 담긴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래기 위함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이웃 신라를 공략하기 유리한 전략적 위치를 찾았던 것일까.

공방 터 깊고 길쭉한 구덩이 3개 #흙 퍼낼수록 악취, 알고 보니 … #오물은 흐르는 물 따라 성 밖으로 #발굴 때 검은 흙속엔 기생충 알

물항아리에 담은 나무 막대기로 뒤처리

산자락의 낮은 구릉에 높은 곳은 깎고 낮은 곳은 성토해 궁장(왕궁 담장) 밖보다 3~4m 높게 만들었다. 위엄과 권위를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해서였을 터다. 규모 역시 부여의 왕궁 터인 관북리 유적과 비슷한 크기에다 구조도 같다.

동서로 490m, 남북으로 240m 가량의 장방형 구조로 담을 쌓고 그 안에 남쪽으로 정전을 비롯한 건물들을 지었으며, 북쪽에는 후원과 수공업 공방을 두었다. 후원은 백제 정원으로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인데, 커다란 연못을 만들어 물을 가두는 형태가 아니라 물길을 만들어 흐르게 하고 주변을 기암괴석과 자갈로 꾸몄다. 기암괴석 중에는 중국산 수석도 있다. 구릉 아래 쪽으로 폭이 3~7m, 길이가 485m에 이르는 대형 수로가 동쪽과 북쪽, 서쪽을 감싸며 흐르도록 설계했다. 이를 위해 수량 조절용 지하 배수시설이 설치된 저수조와 U자형 환수구, 곡수로 등을 만들었다.

전북 익산 왕궁리의 후원 물길 유적. [박종근 기자]

전북 익산 왕궁리의 후원 물길 유적. [박종근 기자]

백제의 정원 양식이 일본에 전해진 것은 역사 기록으로 남아있었지만, 구체적 내용을 알 수는 없었다. 그런데 왕궁리 후원 유적이 발견됨으로써 중국-백제-일본으로 이어지는 정원 양식 교류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공방터에서는 금·은·유리 제품과 이들을 만들기 위한 도가니, 송풍관 같은 제조시설이 발견됐다. 아마도 왕실에 필요한 제품을 만드는 공방이었을 것이다.

왕궁리 유적에서 가장 흥미를 끄는 것은 공방 터 남쪽에서 발견된 화장실이다. 동서 방향으로 깊고 길쭉한 구덩이를 판 화장실 3개가 나란히 있는데 그 중 가장 큰 것은 길이가 10.8m, 폭이 1.8m, 깊이가 3.4m나 된다. 왕성 내에 거주했던 궁인과 관리들이 사용했던 것일 터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출간한 『백제의 왕궁을 찾는 20여 년의 여정』(2011)이 왕궁리 화장실 발굴 당시의 재미난 에피소드를 전해준다. 처음 발굴 당시 조사원들은 이곳을 곡식이나 과일 등 식료품을 저장하던 창고로 생각했다고 한다. 구덩이 바닥에 수분과 유기물을 함유한 검은 흙이 쌓여있었고, 흙 속에서 짚신과 식물 씨앗, 나무 막대기 등이 발견됐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조사원들은 비좁은 구덩이 안에 들어가 온몸에 흙이 묻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조사에 몰두했다. 발견된 나무 막대기는 창고에서 물건을 재는 데 쓰였을 법한 자(尺)로 생각하고 깨끗이 씻어서 애지중지했다고 한다.

그런데 흙을 퍼낼수록 악취가 심해졌다. ‘아무리 곡식이 썩었다고 쳐도 이 정도는 아닐 텐데’라는 의심이 커져갈 무렵, 자문위원으로 현장을 방문한 고려대 이홍종 교수가 “화장실 같다”는 의견을 냈다. 일본 유학시절 봤던 고대 화장실 유적과 흡사한 모양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제안으로 구덩이의 흙을 고대 의대로 보내 생물학 조사를 했다.

기와를 평평하게 쌓은 와적 기단. 백제의 왕궁과 사찰 건물에서 보이는 특징이다. [박종근 기자]

기와를 평평하게 쌓은 와적 기단. 백제의 왕궁과 사찰 건물에서 보이는 특징이다. [박종근 기자]

아니나 다를까. 흙 속에서 기생충 알이 엄청나게 나왔다. 구덩이가 인분으로 가득 차있던 화장실이었다는 얘기다. 반들거리는 나무 막대기는 자가 아니라 볼일을 본 뒤 뒤처리하는 도구였다.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고대의 화장실을 발견한 쾌거를 이룬 순간이었다. 하지만 몇 달 동안 몸에서 떠나지 않던 악취의 정체를 알게 된 조사원들의 마음은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을 터다.

어쨌거나 기생충 조사 결과는 백제인들의 식습관을 유추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도 제공했다. 발견된 기생충은 채식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감염되는 회충과 편충에 집중됐고, 육식을 통해 감염되는 조충은 검출되지 않은 것이다. 이와 함께 민물고기를 먹어서 감염되는 간흡충도 발견됐다. 백제인들이 주로 채식을 했으며, 육류보다는 주변 하천에서 잡을 수 있는 민물고기로 단백질을 보충했음을 알 수 있다.

왕궁성의 화장실은 당시로 볼 때 최신식의 수세식 화장실이었다. 시체말로 ‘푸세식’이다. 구덩이에 걸쳐 놓은 두 개의 나무 판자에 발을 딛고 쭈그려 앉아 볼일을 보는 방식이다. 구덩이에 떨어진 오물은 흐르는 물에 의해 하수도로 모이고 이어 성 밖으로 배출되는 위생적인 시스템이었다. 막대기로 뒤처리를 하는 것이 불결하게 여겨질 수 있으나 물 항아리에 담아두고 헹궈서 닦았으니 당시로서는 깨끗하다 할 수 있었고, 구덩이에 빠뜨리지만 않으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을 테니 나름 친환경적이라고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화장실 유적. 웅덩이 길이가 10m가 넘는다. [박종근 기자]

화장실 유적. 웅덩이 길이가 10m가 넘는다. [박종근 기자]

웅덩이 길이가 10m 이상이니 7~8명이 동시에 일을 볼 수 있었으리라. 고대 로마 유적의 공동화장실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여러 명이 동시에 일을 본다고 미개함을 논할 게 아니다. 그나마 왕궁이니 그런 시설도 있었던 것이다. 일반 백성들까지 그런 혜택을 누리진 못했을 테고. 그나마 뒷간이라도 있으면 다행이었을 것이다. 경주의 신라 동궁에서 석조로 발판을 만든 럭셔리 화장실이 몇 해 전 발견됐지만 왕자 같은 특별한 신분만 사용하던 것이었을 것이다.

인구가 폭증한 조선시대에는 오히려 상황이 나빠졌다. 실학자 박제가는 조선 후기 한양의 화장실 사정을 이렇게 전한다.

“오늘날 도성 안 대부분의 집이 더럽고 지저분하다. 수레가 없어서 오물을 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 서울에서는 매일 같이 뜰이나 거리에 오줌을 버려 우물물이 전부 짜다. 냇가의 축대 주변에는 인분이 덕지덕지 말라붙어서 큰 장마가 아니면 씻겨 내려가지 않는다.”(『북학의』)

연암 박지원의 단편 『예덕선생전』을 보면 조선시대에 측간의 인분을 치우는 직업이 있었다. 그들은 전문적으로 분뇨를 수거해 도성 외곽의 밭에 뿌려주고 대가를 받았다. 조선의 경우 궁궐에도 화장실이 따로 없는데 아마도 궁궐 전문 처리업자들이 모아놓은 분뇨를 매일 수거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반의 경우 인분을 뿌릴 밭에 비해 인분을 생산하는 사람이 지나치게 많다 보니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중세 유럽도 오물 천지, 그래서 하이힐이?

사실 중세 유럽의 런던이나 파리 같은 대도시 사정은 우리보다 더했다. 화장실이 따로 없어 실내에서 요강에다 볼일을 본 뒤 다음날 아침 창 밖으로 던졌다. 주택가 골목길의 가운데 부분에 움푹 패인 골을 만든 이유가 오물을 치우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인구가 많다 보니 도저히 감당이 안돼 길에 오물이 넘치고 악취가 진동했다. 하이힐이 만들어진 이유도 거리의 오물을 밟지 않기 위해서란 얘기도 있다.

공동화장실이나마 있으면 다행인 중국의 오지나, “독립보다 화장실이 더 급하다”던 간디의 외침이 오늘날에도 유효한 인도의 경우는 그야말로 최악이다. 오늘날 세계 어느 나라 대도시를 다녀봐도 우리만큼 화장실을 이용하기 편리한 나라는 없다. 지하철 역마다 공중화장실이 다 있고, 도심의 건물 화장실이 개방돼있는 까닭이다. 단언컨대 자부심을 가져도 될 만한 우리의 화장실 문화의 뿌리가 백제의 화장실에서 비롯된 것이라 해도 크게 과장은 아닐 듯싶다.

이훈범 대기자 / 중앙콘텐트랩 cielble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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