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전영기의 퍼스펙티브

문재인 정부 촛불혁명 주의해야…이념 얻고 자유 잃으면 본말전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1면

전영기
전영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중국 문화혁명 시대의 ‘참새와 호랑이’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다음의 글은 후쑹타오(胡松濤)라는 중국 학자가 2016년에 써서 이듬해 번역된 『정치인의 언격-현대사를 바꾼 마오의 88가지 언어전략』과 영국의 기자 출신 작가인 필립 쇼트가 1999년 초판을 내 마오쩌둥(毛澤東)전기의 결정판으로 평가받는 『마오쩌둥』의 제2권 ‘문화혁명의 붉은 황제’로부터 많은 부분을 발췌, 인용했다. 사실성과 묘사성이 뛰어나서 가감할 게 별로 없었다. 중간중간 기자의 판단과 해설이 들어가기도 했지만 거두절미의 오류를 범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마오쩌둥 극좌 독재체제의 비극 #인민의 이름으로 자산계층 박멸 #‘참새에 관한 보고’ 전달에만 3년 #혁명 잘못하다 빈곤·황폐만 남겨

참새는 소박하고 평범한 새다. 마오쩌둥 주석은 “참새를 해부하자”는 말로 새로운 작업을 제창했다. 그는 농산물 증산을 가로막는 제1주범으로 참새를 지목했다. 1956년 참새를 없애 농업을 살리자는 발상은 살아있는 신과 다름없는 마오의 입에서 나온 만큼 1960년 공식 폐기되기까지 그 나라의 가장 진지한 경제 정책 중의 하나가 되었다.

마오쩌둥은 “네 가지 해로움을 제거해야 한다. 5년, 7년 혹은 12년 안에 모든 곳에서 쥐, 참새, 파리, 모기를 기본적으로 소멸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 때부터 강력한 국가 기관들이 움직여 참새에 대한 포위와 도살 작전을 전개했다. 1958년 4월 19일엔 베이징 인민 전체가 출동했다. 도수 높은 안경을 낀 지식인들도 대나무 몽둥이를 들고 지붕에 올라가 참새를 쫓았다. 저명한 교육가 예성타오는 그의 일기에서 이렇게 적었다.

“새벽 4시가 지나자 참새를 포위 공격하는 작업이 시작됐다. 공공기관 건물 꼭대기의 확성기에서 사람의 호령 소리가 들렸다. 각 가정에서는 폭죽을 쏘고 큰 소리를 내서 참새는 쉬지도 못하고 날다가 지쳐 땅으로 떨어졌다(…) 베이징만보에 따르면 오늘 오전에 참새를 박멸한 숫자가 1만5000마리라고 한다. 직장의 당번들은 구역 안에 있다가 참새를 보기만 하면 쫓아내 머물지 못하게 했다.”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베이징의 참새 박멸 작전은 처참했다. 사방에서 도망다니던 참새는 앉을 곳이 없어 극도로 지친 상태로 한 마리씩 땅에 떨어져 기절하여 죽었다. 외신에서는 “베이징 도시 전체가 온몸에 깃털을 가진 반혁명분자와 작전하고 있다”고 평론했다. 인민일보의 이튿날 보도에 따르면 1958년 4월19일 새벽부터 저녁 10시까지 지쳐서 죽고 독을 먹어 죽고 맞아 죽은 참새가 8만3249마리라고 집계했다. 중국 역사상 참새가 이처럼 집중적으로 정치적 관심을 받은 적은 없었다. 그 때 이런 동시가 유행했다. “작은 참새 일어나지도 않았는데/갑자기 징과 북이 하늘을 울리는 소리를 듣는다/작은 참새 숨을 곳 없어/입으로 짹짹거리며 어미새를 찾는다/작은 참새 날지도 못하고 평야에서 목숨을 잃었다.”

참새는 인민들에 의해 철저히 박멸되었다. 그 부리는 작아서 발언권도, 대변인도, 해명을 들어주는 사람도 없었다. 1959년 11월 중국과학원 당조(黨組) 서기 장진푸(張勁夫)가 ‘참새 문제에 관해 주석에게 드리는 보고’를 올렸다. 제목이 무척 장중하다. “참새는 곡식을 먹기도 하지만 해충도 잡아 먹는다. 따라서 참새가 없으면 해충이 창궐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보고는 참새에 대한 마오쩌둥의 견해에 영향을 주었다. 마오쩌둥은 4개월 뒤 그 견해를 수용해 1960년 3월18일 “참새는 잡지 말고 바퀴벌레로 대신하라”는 새로운 지침을 내렸다. 중국 산하에 멸종될 뻔 했던 참새가 사면,복권되는 데 4년이 걸렸다.

이솝 우화의 ‘벌거숭이 임금님’같은 참새 이야기는 사실 전체주의적인 독재 체제에선 언제라도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마오쩌둥의 뜻에 거스르면 당 총서기든 정부의 총리든 국방장관이든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죽거나 귀양가서 병사하거나 자살을 강요받는 살벌한 정치판에서 벌거숭이 황제한테 ‘멋지다’‘좋은 옷을 입으셨다’는 입에 발린 말을 누구든 왜 안하겠는가. 사람의 인지와 판단 능력은 놀랍도록 단순한 데가 있어서 독재자가 ‘모든 것이 잘 돌아가고 있다’는 보고를 반복해서 듣다 보면 종국에는 진짜 그런 줄 알게 된다. 마오가 탁월한 전체주의적 독재자인 점은 기존 보고와 정 반대의 새로운 진실이 접수될 때조차도 원래의 확신과 이념을 바꾸지 않는다는 데 있다. 참새의 진실을 알고 정책을 변경한 것은 마오의 정치에서 오히려 예외적인 사안에 속한다.

마오쩌둥은 세계 사회주의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농민의 토지를 집단화,국유화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공산당의 지도 아래 인민 군중을 동원해 자산계급을 잔인하게 소탕하는 공포 정치 때문이었다. 사유재산을 빼앗긴 농민들의 생산성은 급감했고 숙청을 피하기 위해 지방 관리들의 거짓, 과장 보고는 급증했다. 그래도 농업 전문가 덩쯔후이 부총리(1955년)나 충직한 비서 텐자잉(1962년)같은 사람들은 ‘수백만 명의 아사자가 속출하는 등 부작용이 크다.집단화, 국유화 속도를 줄여야 한다’라는 진실 보고를 했다. 그 때 마오쩌둥이 내놓은 유명한 답변이 “농민은 자유를 원하지만 우리는 사회주의를 원한다”였다. 이 한마디로 인민의 삶의 형태는 확정되었다.

‘인민의 행복을 위해 일으킨 사회주의 혁명이 혁명의 대의를 위해서라면 인민의 행복은 희생될 수 있다’로 교리가 변질되는 순간이다. 여기서 혁명의 대의란 곧 마오쩌둥과 그가 대변한다는 ‘인민 권력’의 장기 유지다. 마오의 전체주의적 독재, 극좌 모험주의적 정책이 종언을 고한 것은 그가 죽고 덩샤오핑이라는 실용주의 권력자가 등장한 이후였다. ‘사회주의 시장경제’는 덩샤오핑이 창시했는데 마오쩌둥 시대였다면 덩은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마오가 가리킨 참새는 요새 한국의 정치 용어로 치면 적폐 세력의 상징이었다. 마오는 참새 사냥을 통해 경제적으로 농업 정책과 정치사회적으로 적폐 청산을 동시에 진행했다. 그 전에 당의 영구 집권에 방해가 되는 세력들을 궤멸시키기 위해 고안된 구호는 ‘호랑이를 때려 잡자(打老虎)’였다. 이 슬로건 역시 언어의 천재인 마오쩌둥의 작품이다. 1952년 공산당 군사위 총정치부의 기록에 따르면 호랑이는 ‘탐오(貪汚)’라 하여 부정축재로 큰 돈을 번 자산계급을 지칭했다. 호랑이는 시간이 흐르면서 세분화돼 1965년엔 흑오류(黑五流·다섯개의 검은 무리) 즉 ①지주 ②부농 ③반혁명 분자 ④악질 분자 ⑤우파 분자로 범위가 넓어 졌다. 52년 1월에 마오 주석은 “동지들의 관심을 큰 호랑이 찾기에 돌리고 끝까지 추격하여 포획하기에 힘쓰라. 멈추지 말고 해이해지지 말고 이미 얻은 성적에 만족하지도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각 기관에 예를 들어 ‘공무원의 10%’같은 비율을 할당하여 반드시 숫자를 채우도록 했다.

마오쩌둥이 1976년 사망한 뒤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잦아 들었다. 덩샤오핑은 불굴의 의지로 나라를 정상화시켰다. 2014년 마시투(馬識途)라는 작가는 마오쩌둥 시대의 호랑이 잡기를 회고하며 “대담하게 의심하고 탐사했다. 강요된 자백을 옮겨와 유죄 추정의 방침을 써서 죄를 인정하도록 강박하고 꾀어 냈다. 그 결과 호랑이는 갈수록 살지고 부패 숫자도 늘어만 갔다”라고 썼다.

요즘, 세상을 좋게 바꾼다는 뜻으로 여기저기서 혁명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실제 역사 속에서 진행된 혁명은 나쁘게 흘러 갈 때도 많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스스로 ‘촛불혁명으로 탄생된 정부’라고 말한다. 혁명하려면 좋은 쪽으로 잘 해야한다. 잘못하면 빈곤이 닥치고 나라가 황폐해 진다. 원자력 죽이기나 소득주도 성장은 참새 박멸의 느낌이 나고 적폐청산에선 호랑이 때려잡기가 연상된다.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