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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 미술] 미완의 근대 드러내기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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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8호 31면

이주현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이주현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올해, 근대화단을 재조명하는 전시가 활발히 열리고 있다. 서화협회의 활동상을 조명한 ‘근대서화: 봄 새벽을 깨우다(국립중앙박물관)’, 정찬영, 정종여 등 6인의 작품을 개괄한 ‘근대미술가의 재발견: 절필시대(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는 근대미술에 냉담했던 미술계의 분위기를 일신시켜줄 반가운 전시들이다. 근대수묵화단을 대표하는 이상범과 변관식의 작품 100점이 전시된 ‘한국화의 두 거장 청전·소정(갤러리 현대)’ 역시 근래 보기 드문 규모로 근대기 산수화가 이룬 성과를 선보이고 있다.

이상범과 변관식은 서화미술회 출신으로 전통화단의 혁신을 꾀하며 ‘동연사’를 조직했던 동료였다. 이후 변관식은 일본 유학길에 올랐으며, 이상범은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국내 화단에서 입지를 굳혀 해방 이후 대한민국전람회 심사위원, 홍익대의 교수로 재직하며 미술계의 중진으로 활약했다. 반면 변관식은 귀국 후 서화협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1937년 이후에는 금강산에 들어가 방랑의 세월을 보냄으로써 친일행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해방 후 그는 파행으로 얼룩진 대한민국전람회의 비리를 신문에 폭로하고, 야인의 길을 걷게 된다. ‘외금강 삼선암추색’은 기억 속 금강산을 재구성한 것이지만 현장을 사생한 듯 생동감이 넘친다. 차곡차곡 쌓은 묵직한 묵필은 변관식이 밝힌 바처럼 청나라 석도(石濤)에서 유래하나, 이를 다양한 먹의 농담과 리드미컬한 운필로 세련되게 변용하였다.

변관식, 외금강삼선암추색, 1959, 종이에 수묵담채.

변관식, 외금강삼선암추색, 1959, 종이에 수묵담채.

우리 근대화단이 역사의 질곡을 뚫고 일궈낸 소중한 성과를 생각하면, 수묵화에 대한 무관심이 아쉽기만 하다. 제국주의와 일제 침략의 근대사를 겪었으나 여전히 수묵화가들에 대한 관심과 애호가 끊이지 않는 중국의 미술계를 떠올리면 더욱 그러하다.

중국 역시 1919년 5·4운동 이후 서양의 사실주의를 도입해 전통회화를 개량하려는 ‘중국화개량론’이 대두됐고, 절대적 우위를 점했던 문인화가 ‘악화(惡畵)의 총집합’으로 폄훼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우리와 다르게 반식민지 상태였던 중국은 전통의 자생적 회복이 가능했으며,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문화적 국수주의가 퍼지자 침체됐던 전통화단은 활기를 되찾게 된다.

보다 심각한 위기는 신중국이 건국되고 수묵화 고유의 기법이 사회주의 사실주의의 미학과 충돌하면서 나타났다. 문화대혁명(1966~1976) 동안 수묵화는 혁명성이 결여된 ‘흑화(黑畵)’로 격하되기에 이르나, 개방개혁 이후 수묵화가들이 복권되고 미술시장이 활성화되면서 전통화의 위상은 재정립되었다. 또한 제백석(齊白石) 등 전통화가를 중국의 대표적 작가로 만들려는 정부의 노력이 더해져 중국 근대 수묵화단은 현대 추상수묵을 든든히 뒷받침해주고 있다.

우리 수묵화단의 침체 이유 중 하나는 근대에 덧씌워진 역사의 그늘일 것이다. 피식민과 친일, 이념 대립과 분단의 역사를 미술을 통해 들여다보는 것은 아프고 불편한 일이다. 그럴수록 보다 많은 전시를 통해 미술품에 새겨진 상처를 밖으로 드러내고 대중의 공감과 토론을 끌어내는 것이, 여전히 현재형으로 우리를 속박하는 청산되지 못한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지름길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이주현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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