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후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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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문학이론상으로는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문제가 현대문학의 중요한 한 과제다. 그러나 그 무엇(주제)이 없는 표현방법만의 세련은 한갓 기교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사실 자기의 생각, 감정의 상태, 느낌의 정황들을 정확하게 표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거기에 꼭 맞는 말을 찾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작품들은 생각과 정황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홍혜란의 <정전>은 20세기의 문명시대에도 정전상태가 발생한다는 비판적 의식을 암시적으로 표현하면서 어둠속에서 예비의 촛불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살을 녹이고 뼈를 태우는 아픔으로서만이 밝음을 줄 수 있다는 희생정신을 바탕에 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어떤가?
최정미의 <비창>은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제6번『비창』을 오브제로하여 시적으로 승화시킨 역작이다. 선율을 강물에 비유하여 인생의 불안과 절망과 패배의식 등의 부정적 정서(악상)를 자아화한 서정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시상이 4연으로 전개되지만 지면관계로 두 연만 뽑는 아쉬움이 남는다.
최금희의 <회상>은 그리움의 정념을 사무치게 노래하고 있다. 서정시의 본질은 정서며 원형적 정서 그것은 단순하지만 긴 생명력을 지니는 것이다. 그러나 제목이 너무 직접적이요, 낡은 감이 든다.
임철기의 <시계>는 결혼의 의미를 시계를 통하여 표출한 작품이다.
결혼 예물로 받은 사랑의 정표가 수갑이라는 인식이 놀랍다. 사실 결혼예물로 교환되는 반지며 손목시계들은 옛날 노예들의 발목에 채워졌던 족쇄에서 유래한 상징물이다. 결혼생활이란 곧 서로 도망칠 수 없도록 수갑을 차고 가는 것이다. 어떤 경우도 함께 하겠다는 의지가 건강하다.

< 김제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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