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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미달이 할머니’ 선우용여의 즐거운 인생

중앙일보

입력

1965년 TBC 무용수 데뷔, 1년 뒤 연기자로 변신
뇌경색 극복하고 인생 2막…55년째 왕성한 방송 활동

월간중앙·대한노인회중앙회 공동기획 同行(2) | 존경받는 시니어, 골드보이가 간다 #“지나간 일 아쉬워 말고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

선우용여는 ’직업으로서 배우의 가장 큰 매력은 여러 인생, 다양한 경험을 해볼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선우용여는 ’직업으로서 배우의 가장 큰 매력은 여러 인생, 다양한 경험을 해볼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달이 할머니’ 선우용여(74, 본명 정용례)를 만난 건 5월 3일 오전. 이날 선우용여는 서울 마포구 상암동 모 방송국 예능프로그램 스튜디오에서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방송 녹화에 참여했다.

녹화는 대학교 수업처럼 1시간남짓 촬영하고 10분 쉬는 식으로 진행됐다. 점심시간 1시간을 빼면 총 6~7시간에 달하는 강행군이었다. 아침 10시에 시작된 녹화는 오후 5시 넘어서 끝이 났다.

젊은 사람들에게도 버거운 일정이지만 선우용여는 녹화 내내 웃음을 잃지 않았다. 녹화 도중 잠시 짬을 내 월간중앙과 만난 선우용여는 “나는 몸이 아파서 축 늘어져 있다가도 카메라만 돌아가면 씻은 듯이 낫는다”며 “그래서 지금까지도 배우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환하게 웃었다.

올해 만 74세인 선우용여는 1945년 8월 15일에 태어난 진짜 해방둥이다. 그해 태어난 사람들을 모두 해방둥이라고 부르지만, 생일까지 8월 15일이니 선우용여는 진정한 해방둥이인 셈이다. 광복 70년이던 지난 2015년, 선우용여는 연예계를 대표하는 해방둥이로 주목받기도 했다.

2013년 8월 서울 중구 서소문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JTBC 드라마 [더 이상은 못 참아] 제작발표회에서 자리를 함께한 선우용여와 백일섭.

2013년 8월 서울 중구 서소문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JTBC 드라마 [더 이상은 못 참아] 제작발표회에서 자리를 함께한 선우용여와 백일섭.

서라벌예대 연극영화과를 나온 선우용여는 1965년 TBC 1기 무용수로 발탁돼 연예계에 발을 들였다. 이듬해인 1966년 영화 [병사는 죽어서 말한다]와 TV 사극 [상궁나인]으로 각각 스크린과 브라운관에 데뷔해 오늘에 이르렀다. 올해로 연예계 데뷔 55년째, 배우 데뷔 54년째를 맞았다.

선우용여는 고(故) 김세명씨와 1969년 결혼해 슬하에 1남 1녀를 뒀다. 특히 딸 최연제(본명 김연재)는 1990년대 중반 ‘너의 마음을 내게 준다면’이라는 곡을 발표해 국내에서 큰 인기를 모았다.

미국에서 의대를 다니던 딸이 한국으로 돌아와 가수로 깜짝 데뷔한 것과 관련해 선우용여는 “한국에서 가수 활동을 했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며 “의대 수업료가 워낙 비싸다 보니 딸 스스로 가수 활동을 해서 돈을 벌려고 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미국에서 한의사로 활동하고 있는 최연제는 미국인 남편과 결혼해 아들을 낳았다.

고희(古稀)를 훌쩍 넘겼는데도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이 궁금합니다.
“왜 사람들은 자꾸 나이를 물어보나요?(웃음) 난 그런 거 의식하지 않고 살아요. 의식하지 않고 사는 게 건강 유지의 비결이라면 비결인 것 같아요. ‘내가 몇 살이구나’라고 의식하면 ‘이제 얼마 안 남았구나’ 이런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돼요. 그런 일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자꾸 그러다 보면 ‘몇 살쯤에 가겠구나’라는 어두운 마음이 들지 않겠어요? 하루하루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사는 겁니다.”

김기영 감독 권유로 정용례에서 선우용녀로 변신

1970년대 초반 TBC 드라마에 함께 출연한 선우용여(오른쪽)와 여운계.

1970년대 초반 TBC 드라마에 함께 출연한 선우용여(오른쪽)와 여운계.

선우용여는 3월 23일 방송된 JTBC [하우스]에 출연해 뇌경색 극복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는 과거 한 방송사의 건강 정보 프로그램 촬영 중 뇌경색을 발견했다고 한다. 선우용여는 “갑자기 말이 잘 안 나오는데 옆에서 ‘선생님 왜 그러세요?’라고 묻더라”고 운을 뗐다. “(의사가) 손을 들어보라고 했는데 손이 올라가지 않고 툭 떨어졌다. 그 길로 병원에 갔다.” 덕분에 선우용여는 뇌경색을 초기에 발견하고 치료할 수 있었다. 요즘에는 꾸준한 운동과 식이요법으로 건강을 지키고 있다.

나이는 의식하지 않고 사시나 보군요?
“예전에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7년 정도 살았던 적이 있어요. 그때는 봄·여름·가을·겨울 다 잊고 살았지요. 그러니 내가 몇 살인지도 모르고 살게 됐고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나이를 물어 봐요. 방송에서도 ‘봄이 왔다’, ‘겨울이 갔다’는 식으로 너무 자주 이야기하니까 나이를 의식하게 되는 거죠. 사실 늘 오는 게 봄이고, 늘 가는 게 가을 아닌가요? 좀 무심히 살면 어떨까 싶어요. 저는 ‘또 한 해가 갔다’는 식의 말은 잘 안 하고 살아요.”

1969년 선우용여는 24세 꽃다운 나이에 10세 연상의 남편과 결혼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시작부터 순탄치 못했다. 결혼식 당일 남편에게 돈을 받으려는 빚쟁이들이 몰려든 것이었다.

'순풍산부인과' ‘용녀’는 실제 캐릭터와 닮은꼴

선우용여와 그의 딸 최연제. 최연제는 1990년대 초·중반 국내에서 잠시 가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선우용여와 그의 딸 최연제. 최연제는 1990년대 초·중반 국내에서 잠시 가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결혼과 동시에 빚더미에 앉은 선우용여는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영화·드라마·CF 가리지 않았다. 빚을 갚기까지 꼬박 9년이 걸렸다. 선우용여는 과거 한 방송에 출연해 “당시 집 한 채 값이 50만원이었는데, 그때 빚이 1750만원이었다”며 “그 돈을 갚느라 애 낳고 촬영을 하며 3일 만에 강원도 바다에 빠지기도 했다. 이후 쉬지 않고 계속 일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어렵사리 빚을 갚은 선우용여는 한창 왕성하게 활동하던 1982년 돌연 브라운관을 떠나 가족과 함께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엄마는 원래 매일 밖으로 나가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옆집 엄마는 집에 있더라”는 딸 연재의 말에 삶의 행로를 틀었던 것이다.

선우용여는 미국으로 가서 배우가 아닌 일반인으로 살면서 아이들에게 못다 줬던 사랑을 쏟기로 했다. 그러나 미국 생활은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두 팔 걷어붙이고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녹록지 않았다. 선우용여는 “미국으로 건너간 뒤 4~5년간 공장·식당 등을 운영했지만 번번이 실패를 맛봐야 했고 가세가 기울자 파출부를 하려고도 마음먹었다”고 밝혔다.

이어 “아는 언니가 미장원을 운영하는데 날로 번창해 가는 것을 보고 미용학교에 들어갔고, 웨스트우드(캘리포니아주에 있는 학원가)에 취직해 20일 동안 일을 한 적도 있다”며 “그러다 대하드라마 [역사는 흐른다](1989)에서 섭외 전화가 와서 한국 연예계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렇게 무심히 살려고 노력했건만 어느덧 연기 인생 반백 년이 지났죠?
“스무 살 때 연예계에 데뷔했으니 참 오래됐네요. 그런데 저는 일부에 알려진 것처럼 무용과 출신이 아니에요. 서라벌예대 연극영화과를 나왔어요. 무용(발레)은 고등학교 때까지만 했어요. 대학교 때 저에게 연예계 데뷔를 권했던 교수님이 ‘일단은 무용으로 시험을 보라’고 해서 무용수로 TBC에 들어간 겁니다. 6개월 동안 (배우) 교육을 받고 나서 드라마 주인공으로 발탁됐어요.”
선우용여라는 예명(藝名)은 어떻게 탄생했나요?
“1966년 영화 [병사는 죽어서 말한다]는 작품을 할 때였어요. 저는 사실 김기영 감독님이란 분이 누구인지도 몰랐을 때인데 카메라 감독님에게 물어 봤더니 ‘굉장히 유명한 분’이라고 귀띔해 주더군요. 그렇게 해서 김기영 감독님을 만나게 됐는데 저에게 선우용녀라는 예명을 권하더군요. 그때부터 선우용녀가 됐고, 나중에 사람들이 자꾸만 용녀와 용여를 헷갈리길래 선우용여가 된 겁니다. 처음 연예계에서 활동하던 때는 정용례였었죠. 사실 용례는 발음이 좀 어려운 이름이잖아요.”
53년 연기 인생이면 출연작도 엄청나게 많을 텐데요.
“말도 못하죠, 진짜 많아요. 드라마에 영화까지 더하면 다 기억 못합니다. 1960~70년대만 하더라도 한 달에 영화를 6편까지 찍을 때도 있었어요. 그때는 마치 벽돌공장에서 벽돌 찍어내듯 영화를 만든 시절이었죠. 지금 같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가수나 배우에게는 특별히 애착이 가는 작품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첫 작품인 [상궁나인]이 기억에 많이 남는군요. 또 [외아들]이란 작품도 생각나고요. 그 작품을 할 때 우리 아들도 낳았으니까 더 그렇죠. 그리고 [순풍산부인과]를 잊을 수 없어요. 그렇게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작품들이 있긴 하지만, 드라마든 영화든 할 때마다 다른 느낌이라 제게는 다 소중한 것 같아요. ‘그때 더 열심히 할 걸’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순풍산부인과]는 1998년 3월부터 2000년 12월까지 만 2년9개월 동안 총 682회 방송된 SBS의 대표적인 시트콤이다. 당시 경쟁사에서는 메인뉴스를 할 시간인 9시에 방영됐음에도 평균 시청률이 25%를 넘었을 만큼 국민적 인기를 누린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선우용여는 ‘순풍산부인과’ 오지명 원장의 부인으로 네 딸과 손녀(미달)를 둔 주부로 출연했다. 극 중에선 선우용여는 화투를 유독 좋아하는 수다스러우면서도 꾸밈없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남편에게 혼나기 일쑤지만 할 말은 해야 직성이 풀리는 담백한 성격이다.

지금까지 소화한 배역 중에서 실제 본인의 캐릭터와 가장 비슷한 역은 누구였나요?
“[순풍산부인과]에서 미달이 할머니가 실제 제 성격이나 모습과 가장 닮은 것 같아요. 미국에서 돌아온 뒤에 받은 (주연) 배역이라 기억에 남기도 하고요. 미국에서 5년 가까이 식당을 하면서 참 많은 걸 배웠어요. 그러다 한국에 돌아온 뒤로 ‘이렇게 살면 안 되겠구나’라고 느꼈죠.”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사실 남편과는 나이 차도 많은 데다 남편이 좀 무서운 편이라 제가 많이 눌려서 살았던 것 같아요. 그러다 미국에서 돌아오면서 그런 억눌림 같은 게 많이 풀렸지요. [순풍산부인과]의 출연 제의를 받고 연기를 해보니 극 중 상대 역인 오지명 선배가 실제 제 남편과 비슷한 캐릭터인 겁니다. 집에서는 실제 남편한테 할 말은 했기에 극 중에서도 오지명 선배한테 할 말은 마구 했어요(웃음). 그때만 해도 엄마들이 남편들한테 눌려서 살았던 때 아닌가요?”

“노사연의 ‘바램’이란 노래를 들으면 내 노래 같아”

1969년 거행된 김세명-선우용여 커플의 결혼식.

1969년 거행된 김세명-선우용여 커플의 결혼식.

결혼생활의 힘든 부분들, 가슴속 고민들을 나눴던 동료는 어떤 분인가요?
“마음을 깊이 나눴던 분은 여운계(1940~2009) 언니였어요. 그분이 가시고 나서는 전원주(80) 언니랑 가깝게 지내고 있어요. 원주 언니와도 마음을 나누는 사이입니다.”

4월 10일 방송된 TV조선 [인생다큐 마이웨이]에서 전원주는 선우용여와 돈독해진 계기를 밝혔다. 전원주는 고 여운계의 소개로 선우용여를 만났다. 전원주는 “선우용여가 한창 잘나갈 때 먼저 다가오지 않고 자기 갈 길만 가더라”며 “여운계한테 ‘쟤는 깍쟁이겠다’고 했더니 ‘아니야 친해지면 안 그래’라고 했다”고돌이켰다.

그렇게 해서 거리를 좁힌 두 사람은 같은 아픔을 나누며 더욱 돈독해졌다. 전원주는 2013년 4월, 선우용여는 2014년 6월에 남편과 사별했다. 전원주는 “그때부터 더 친해졌다”며 “같이 혼자가 됐으니까”라고 했다.

연기자로서 반백 년을 살아왔습니다. 가장 보람된 일은 무엇인가요?
“연기자로서 보람이라…. 우리 시절에는 먹고사느라 너무 바빴어요. 하지만 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해요. 정말 열심히 최선을 다하며 살았어요. 말년이 돼 보니 ‘열심히 살았던 대가를 (하늘이) 주시나 보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남들이 잘 모르는 힘든 일도 많았죠?
“옆도 뒤도 보지 않고 그저 앞만 보고 살아왔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것도 모른 채 오로지 연기랑 집만 생각했지요. 그런데 남편도 떠나고, 애들도 출가하고…. 세상을 돌아보니 너무 앞만 보고 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군요. 노사연의 ‘바램’이란 노래를 들으면 내 노래 같아서 눈물이 나요.”

노사연이 2014년 발표한 ‘바램’은 ‘사랑을 위하여’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싱어송라이터 김종환이 작사·작곡한 노래다. “내 손에 잡은 것이 많아서 손이 아픕니다. 등에 짊어진 삶의 무게가 온몸을 아프게 하고(…)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는 노랫말은 중장년 팬들 사이에서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세요?
“방송이 있으면 나가고요, 나가면 열심히 하죠. 제가 방송에 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즐거워하는 분들이 있기에 저 역시 즐거운 거죠. 그리고 시간이 되면 좋은 풍경, 좋은 세상 보면서 말년을 보내고 싶어요. 영화 촬영지는 다 좋은 곳인데 예전에는 제대로 감상해 보지도 못하고 살았어요. 되돌아보니 다 좋은 곳이었는데…. 과거에 제가 영화나 드라마에 출연해서 촬영했던 곳들을 찾아 다니면서 나무도 보고, 바람도 쐬고 싶어요.”
돌아보면 아쉬운 점도 없진 않을 것 같은데요.
“그런 건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이미 다 지나간 것 아쉬워하면 뭐하나요? 좋은 것 보고 좋은 것 먹기에도 시간은 부족해요. 흘러간 건 흘러간 것일 뿐이에요. 앞으로는 더 즐기고 더 좋은 것 보고 더 좋은 생각하며 살고 싶어요.”

“노년에는 건강이 최고… 자신만 생각하라”

1976년 선우용여가 동료 배우 박병호(왼쪽)·이순재와 함께 일본으로 출국하기 전 팬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1976년 선우용여가 동료 배우 박병호(왼쪽)·이순재와 함께 일본으로 출국하기 전 팬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인생철학이나 연기철학이 궁금합니다.
“그렇게 거창한 건 없어요(웃음). ‘연기하면서 죽겠다’는 식의 생각도 저는 안 해요. 저는 현실적으로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에요. 지금 이 순간을 즐길 뿐이고, 내일 올 것을 미리 걱정할 필요 없다는 거죠. 또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노인이 돼 보니, 박사? 배우? 정치가? 철학자? 다 필요 없어요. 건강한 게 최고예요. 건강하고 싶으면 남들 의식하지 말고 이 순간을 즐기면서 살아야 해요. 자신만 생각하라는 거죠.”
배우가 어떤 직업이라고 생각하세요?
“좋은 직업이에요. 다양한 인생을 살아볼 수 있으니까요. 저 사람을 내가 연기해 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연기를 하게 되면 참 재미있어요. 또 ‘저렇게 살면 안 되는데’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역할을 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고요. 인생은 한 번뿐이에요. 그런데 연기자는 여러 인생을 살아볼 수 있으니까 너무 재미있는 것 같아요. 마주치는 사람들이 다 배역으로 보일 때가 있어요(웃음).”
배우나 연예인을 꿈꾸는 청소년들이 많습니다.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으신가요?
“세상에는 여러 직업이 있어요. 배우만 대단한 직업은 아닙니다. 생각해 보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거죠. 나는 카메라만 돌아가면 아픈 것도 사라지는 사람이에요. 카메라가 멈추고 나면 다시 아프지만(웃음).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 자연스럽게 발전하게 되는 것 같아요. 남이 좋다고 해서 따라 하지는 말라는 말을 해주고 싶군요. 사람들이 이 세상에 다양하게 태어났으니 직업도 다양한 겁니다. 저를 도와주는 도우미 아줌마가 있으니 제가 이렇게 방송활동도 할 수 있는 거고요. 그래서 다양한 직업을 서로 소중하게 대하고 평등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직업은 좋고, 어떤 직업은 나쁘다고 생각하는 건 곤란해요. 내가 웃기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이 웃으면 저는 그걸로 만족합니다. 다른 직업도 마찬가지겠지만 연기자가 되고 싶다고 연기자가 쉽게 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빛이 날 때까지 참을 수 있다면 배우가 돼도 좋겠지만 그렇게 하기 어렵다면 다른 직업을 찾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배우는 인기를 먹고사는 직업입니다. 그런데 그 인기를 영원히 누릴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잊혀갈 때의 어려움은 어떻게 극복했나요?  
“그러니까 애당초 그런 것은 생각하지 말아야 해요. 사람들이 나를 인기인으로 보든, 안 보든 내 길을 가야 한다는 거죠. 적어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 왔어요.”

“배우는 천직, 감사하며 살아”

1974년 TBC 드라마 [윤지경]에 함께 출연한 사미자와 선우용여(오른쪽).

1974년 TBC 드라마 [윤지경]에 함께 출연한 사미자와 선우용여(오른쪽).

배우가 된 걸 후회한 적은 없나요?
“솔직히 초창기에는 후회도 했습니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고 언니가 시켜서 한 거라. 그런데 나중에 제 적성에 너무 잘 맞는 천직인 것 같아서 정말 좋았어요. 지금은 너무 감사하며 살고 있어요.”
앞으로 어떤 배역을 해보고 싶은가요?
“이런 질문이 가장 어려워요(웃음). 그냥 주어진 대로 할래요. 이제 노인이니까 노인 역할을 해야겠죠?”
지금까지 이 길을 걸어오면서 특별히 감사하는 분들은 누구인가요?
“TBC의 최상현 PD, 서라벌예대 최영남 교수님이 많이 생각나는군요. 특히 최영남 교수님은 저에게 TBC 시험을 권유하신 분이죠. 우리 언니도 저에게 방송사 시험을 권유한 사람이고요. 뭐니뭐니해도 세상에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이 가장 고맙죠.”
남편과는 몇 해 전 사별했죠? 지금도 이따금 마음이 아련해질 때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맞아요. 그래도 남편이 먼저 갔으니까 복이 있는 것 같아요. 부인 앞에서 남편이 먼저 가는 게 복인 거예요.”

결혼과 동시에 빚더미에 올라 앉았고, 그 빚을 갚느라 청춘을 바쳤지만 선우용여는 결혼을 후회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선우용여는 “남편에게 당뇨·고혈압이 있었는데, 합병증으로 인해 치매에다 파킨슨병까지 오게 되니 몸을 못 움직였다”며 “견디기 힘든 일이 있어도 ‘나한테 큰 희망을 주려고 좌절을 준 거다’ 이렇게 생각하면 용기를 낼 수 있다”고 말했다.

비슷한 연배의 인생 후반전을 살아가는 분들에게 한마디 해주신다면.
“내가 무슨 한마디를 해요?(웃음) 사람들의 인생은 모두 다 다른 것 같아요. 어쨌든 즐겁게 살자는 말을 전하고 싶네요.”

글 최경호 월간중앙 기자 squeeze@joongang.co.kr / 사진 김경빈 선임기자 kgbo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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