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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책읽기Review] 내 안으로의 여행 … 갈피마다 '또 다른 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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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일러스트레이션=강일구 ilgoo@joongang.co.kr

"어쩌면 우리가 슬플 때 우리를 가장 잘 위로해주는 것은 슬픈 책이고, 우리가 끌어안거나 사랑할 사람이 없을 때 차를 몰고 가야 할 곳은 외로운 휴게소인지도 모른다." 프랑스 작가 알랭 드 보통은 '여행의 기술'에서 여행의 힘과 의미를 이렇게 얘기합니다.

올 여름은 어디로 갈 것인가보다 왜 떠나는가를 먼저 고민해보면 어떨까요. 몸보다는 마음의 여정을 기록하는데 더 충실한 여행 에세이들의 도움을 빌어서 말이지요. 지난 주 책캉스 첫번째 '추리.미스터리'에 이어 두번째로 '여행 에세이'를 선보입니다. 신현림 시인이 감성 물씬한 독후감을 보내왔습니다.

어쩌면 여행은 내가 모르는 나의 과거를 보려는 건지 모른다. 바람 따라 흐느끼는 자연 속이나 오래된 유적과 유물 속에서 자신과 닮은 사람을 보고 자신이 쓰던 것과 닮은 물건을 보며 혼을 느끼고 싶은 건지 모른다. 아주 야릇한 기분에 젖어 과거가 지금과 다른 무엇이 있을까 살피고 내일의 선명한 그림을 꿈꾸는 일. 환상일지라도 삶이 영원하다는 느낌을 간직하고 싶은 것. 복숭아 빛 부드러운 살과 살이 닿을 때처럼 뜨겁게, 그렇게 삶을 사랑하고 싶은 거다. 여행은 내 자신이 타인처럼 느껴지거나 타인들도 몸짓 하나 표정 하나 목소리까지 새롭게 와닿는 강렬한 체험이기도 하다.

책읽기는 그런 생생한 여행과 같아서 잠자던 감각을 일깨우고 인생에 신선한 열정과 생명을 불어넣는다. 오래 두고 간직하고 싶은 책은 흔하지 않다. 아무리 특색있게 꾸몄어도 독특하거나 위대한 문체의 맛이 없으면 책을 훑어 본 뒤 쉽게 덮고 만다. 의외로 좋은 책은 서점 깊숙이 숨어 있다.

왜 나는 '카잔차키스의 천상의 두 나라'(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예담, 2002년)를 이제 발견했을까? 서구 문명의 한계와 위기감이 높아지던 1935년에 중국.일본 등 동양을 여행하며 인류의 새로운 희망을 찾던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의 책은 미래에도 여전히 읽어야 할 보물 같은 존재다. 일상 생활에서 깨닫기 힘든 지혜와 숭고한 열망이 담긴 이 책에서 그는 "내가 아는 나라를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만지기 위해 눈을 감을 때면, 마치 연인이 내 곁에 오기라도 한 것처럼 기쁨으로 전율하는 나를 느낀다"고 했다. 만약 그가 찬양하고 전율했던 중국과 일본만이 아니라 한국도 여행해서 썼다면 어땠을까. 아마 관광객 수가 달라졌으리라. 카잔차키스에게서 내가 차마 보고 느끼지 못한 삶의 매혹과 문체의 마술을 보았다면, 시인 윌리엄 히트문의 '블루 하이웨이'(전 2권, 민음사, 2002년)로부터는 언젠가 국도를 따라 샅샅이 여행하고 싶은 강렬한 열망을 얻었다. 읽을수록 나도 이런 책을 쓰고 싶다는 열정이 맑은 날 노을처럼 타올랐다. 히트문은 아내와 직장을 잃은 뒤 미국의 푸른 국도를 달리며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 얻은 생생하고 거대한 인생 이야기를 유려한 문장으로 펼쳐보인다. 그의 글을 떠올리면서 박하향처럼 달콤시원한 바람을 마시며 길과 길을 맛보는 일, 왜 이리 좋은 건지…. 인생 속으로, 길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열정을 되찾기 때문이리라.

그 열정의 한 가운데 '에코토이, 지구를 인터뷰하다'(리오넬 오귀스트 지음, 효형출판, 2006년)가 있다. 이 책은 환경 재앙이 화두가 된 이 시대에 에코 투어, 즉 생태여행의 나팔이 울려 퍼졌음을 알려준다. 한 도시에서 매일 고층빌딩 만한 쓰레기가 쌓이거나 1초마다 축구장 만한 아마존 숲이 쓰러지는 현실 속에서 나는 지구인 모두에게 이 책을 선물하고 싶다. 대학을 갓 졸업한 프랑스 젊은이 세 명이 쓴 고귀하고 친밀한 이 책은 우리가 꼭 읽어야 할 필독서가 될 것이다.

'여행하는 나무'(호시노 미치오 지음, 갈라파고스, 2006년)는 문장마다 푸근하고 신비한 온기가 스미어 가슴을 울린다. 격조 높은 여행기였다.

"모든 생명은 주어진 환경을 극복하는 강인함이 있고, 너무나 쉽게 사라지는 연약함도 있습니다. 나는 생명이 가진 그 연약함 때문에 알래스카를 사랑합니다. 우리가 살아간다는 사실은 어떤 한계 내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기억해야합니다"라고 한 저자. 쿠릴 호반에서 불곰의 습격을 받아 43세에 생을 마감한 그의 글은 자주 느끼는 지리한 권태와 고독감도 사치라 느낄 정도로 아주 귀한 생명의 울림이 있다. 이렇게 좋은 책들은 여행 중에 받은 위로나 기쁨처럼 나를 펄펄 다시 살아나게 한다. 홀로 어둡고 쓸쓸하여도 신비로운 내일로 내달리게 한다.

신현림 시인
일러스트레이션=강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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