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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추상화가의 5·1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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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권근영 JTBC 스포츠문화부 차장대우

권근영 JTBC 스포츠문화부 차장대우

1980년 봄, 윤형근(1928∼2007)은 집 마당에서 붓에 물감을 찍어 시커멓게 되도록 죽죽 내리그었습니다. 후배 조각가 최종태(87)에게 5월 광주의 소식을 뒤늦게 전해 들은 참이었습니다. 이 무렵 그는 잡지 ‘뿌리깊은 나무’와 인터뷰하며 “예술은 똥이여, 사람들이 픽픽 죽어가는데 예술이 다 뭐 말라죽은 거여”라고 한탄도 했습니다.

세상에 내놓지 않고 꽁꽁 숨겨둔 그날의 작품이 지난해 처음 공개됐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연 대규모 회고전에서였습니다. 수직·수평으로 단정하고 꼿꼿하던 그의 청다색 기둥은 이 그림에서만은 무너져 내렸습니다. 윤형근의 그림에서 눈물처럼, 피처럼 물감이 흘러내린 것도 이때부터입니다.

윤형근, 다색, 1980, 마포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윤성렬

윤형근, 다색, 1980, 마포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윤성렬

윤형근은 반골이었습니다. 불의를 참지 못해 삶이 고단했습니다. 충북 청주 출신으로 ‘4·19세대’였던 그는 서울대 미대 1회 입학생이었지만 미군정청의 ‘국립 서울대 설립안’에 반대했다가 제적됐습니다. 숙명여고 교사로 재직할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개입된 입시비리에 쓴소리했다가 반공법 위반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했습니다. 그 뒤 10년을 야인으로 살았습니다.

『25시』의 작가 게오르규가 남긴 “사회가 병들면 시인이 아프다”라는 말을 좋아했다는 윤형근, 그의 그림은 베니스 비엔날레가 한창인 이탈리아에서도 조용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베니스 포르투니 미술관에 걸린 이 그림과 관련 자료를 꼼꼼히 본 관객들은 “한국의 아픈 역사도 알게 됐다”며 공감했다는 게 전시를 맡은 국립현대미술관 김인혜 학예사의 설명입니다.

혐오를 재생산하는 게 아니라 아픔에 함께 분노하고 공감하는 것, 그게 예술입니다. 사람의 눈은 동그라미를 그리면 얼굴을, 세로로 긴 직사각형에서는 서 있는 모습을 연상합니다. 도미노처럼 와르르 쓰러지다 말고 서로 기댄 채 겨우 버티는 기둥들, 그렇게 공감은 공감됩니다.

권근영 JTBC 스포츠문화부 차장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