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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로 ‘기업 디아스포라’…국내 일자리도 빠져나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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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제조업 탈한국 비상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한국 제조업의 해외 직접투자는 금융위기 직전인 2007년부터 2017년까지 매년 80억 달러 안팎에서 안정세를 보였다. 그러나 지난해 상황이 급변했다. 예년의 두 배가 넘는 164억 달러를 기록했다. 직접투자 건수도 5000건으로 최근 5년 중 가장 높은 증가세를 보였다. 한국 경제의 대들보인 제조업의 ‘디아스포라’(해외로 뿔뿔이 흩어짐)가 우려되고 있는 배경이다.

문재인 정부 반시장 정책 2년 만에 #경영 여건 급변하며 해외 진출 러시 #지난해 164억 달러로 두 배 ‘껑충’ #해외 재산 도피보다 더 무서운 일

지역별로는 아시아지역이 89억 달러로 전체의 54%를 차지했고, 중남미와 유럽이 각각 27억 달러로 16.5%씩 차지했으며, 북미는 19억 달러로 11.6%였다. 결과적으로 아시아 : 중남미 : 유럽 : 북미의 제조업 직접투자비율은 2017·2018년이 크게 다르지 않게 대략 5 : 2 : 2 : 1의 비율이 유지됐다. 이 말은 지난해 제조업 해외직접투자 급증 현상은 특정 지역으로의 해외투자 확대가 아니라 거의 모든 나라에 대해 고르고 광범위하게 늘어난 것을 의미한다.

국가별로는 큰 폭의 증가세를 기록했다. 중국은 24억 달러에서 44억 달러, 베트남 14억 달러에서 20억 달러, 미국은 8억 달러에서 19억 달러로 각각 급증했다. 오스트리아는 한꺼번에 12억 달러가 늘어났다. 인도·홍콩도 각각 9억 달러로 껑충 뛰었고, 폴란드도 증가세를 보였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제조업 해외직접투자가 급격하게 늘어난 원인은 무엇일까. 첫 번째 교과서적 가설은 세계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발 빠른 현지화 혹은 글로벌 전략이다. 하지만 미국이 금리를 인상하는 등 지난해 하반기부터 세계 경제 전체가 둔화할 가능성이 커지면서 이 가설은 설득력이 낮다. 다만 지난해 완결된 SK 반도체의 도시바 메모리(약 4조원, 35억 달러) 인수는 국제화 전략의 결과로 해석할 만하다.

두 번째 교과서적 가설은 보호무역 장벽을 회피하기 위한 우회 현지화 전략이다. 이 가설은 미국이나 멕시코-캐나다에 대한 해외투자 증가를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멕시코 투자는 2017년 4억 달러에서 1억 달러로 줄었고 캐나다 투자도 2017년과 2018년 변동이 없었으니 설득력이 약하다. 이 가설은 더구나 개방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는 중국이나 인도에 대한 제조업 해외직접투자의 급증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세 번째 이론은 국내 생산여건 혹은 경영여건 악화에 따른 생산거점의 해외 탈출이다. 임금이나 규제 강화 혹은 법 제도의 변혁 등으로 국내 생산 여건이 악화하는 경우 국내 기업들은 가장 경영 환경이 좋은 나라로 거점을 옮길 수밖에 없다. 이 경우 진출하는 최적의 국가는 업종 특성에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이유로 해외직접투자가 발생한다면 새로운 특정 지역으로의 해외투자가 갑자기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기존 해외투자가 이뤄져 왔던 지역에 대한 확대투자 형태로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가설은 바로 이 부분이다. 2017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한국의 제조업 경영 여건은 눈에 띄게 악화했다. 법인세 인상과 더불어 최저임금이 2년 연속 16.4%와 10.9% 올랐고 52시간 근무제가 법제화됐으며 주휴수당이나 포괄임금지침, 특수직 노동 3권에 대한 보호 등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새로운 노동규제가 도입됐다. 이같이 급격한 노동여건의 변화는 제조업 경영자에게 ‘경영-디아스포라’, 즉 제조업 거점을 전방위적으로 해외로 옮기는 계기를 촉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세 번째 가설을 뒷받침하는 확실한 팩트가 있다. 지난 30년 동안 제조업 해외투자 규모가 한 해 50% 이상 급격하게 늘어난 사례는 꼭 세 번 있었다. 1993년 6억 달러에서 다음 해 15억 달러로 150% 늘어난 경우와 2000년 17억 달러에서 다음 해 40억 달러로 135% 증가한 경우, 그리고 2017년 85억 달러에서 2018년 164억 달러로 93% 증가한 경우가 그것이다. 놀랍게도 세 경우 모두 공통으로 깔린 배경은 가파른 최저임금 인상과 원화 환율 강세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결과, 86년 12월 31일 최저임금법이 제정되고 88년 1월 1일부터 시행된 최저임금은 90년에는 15.0%, 91년 18.8%, 그리고 92년 12.8%나 인상됐다. 이같이 급격한 임금 인상은 제조업체가 93년과 94년 사이에 해외직접투자를 늘리게 했다. 2001년도 마찬가지다. 그해 최저임금은 16.6%나 인상됐고 그다음 해 2002년에도 12.6% 올랐다. 2018년과 2019년 최저임금도 각각 16.4%와 10.9%가 잇따라 올랐다.

급격한 인건비 상승에 더해 제조업 해외직접투자를 촉진한 것은 원화 환율의 강세였다. 원화 환율의 강세는 한편으로는 국내 제조제품의 가격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장 해외이전 비용이나 해외 인건비 부담을 동시에 낮추기 때문에 제조업의 해외직접투자를 촉진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매년 달러에 대해 약세를 보이던 원화 환율은 92년 하반기 강세로 반전됐다. 이것이 제조업 해외직접투자를 촉진하는 촉매 역할을 했다. 99년과 2000년에도 마찬가지로 원화 환율이 각각 15%와 5%씩 달러에 대해 강세를 나타냈고 2017년과 2018년에도 원화는 대체로 2~3% 정도 강세를 보였다. 급격한 임금 인상과 더불어 나타난 원화 강세는 한국 제조업의 가격경쟁력을 한꺼번에 추락시키면서 제조업 해외직접투자를 폭증시켰다. 따라서 임금이나 환율의 악조건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제조업 해외투자는 계속해 일어날 것으로 보인다.

제조업투자가 해외로 빠져나간다는 것은 양질의 국내 일자리와 소득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해 제조업 해외투자로 빠져나간 돈이 164억 달러라면 이는 19조원에 달한다.

지난해 명목 설비투자 157조원의 12%나 되는 금액이다. 이 금액은 연간 일자리 예산과 맞먹는 금액이고 일자리 안정자금(약 3조원)의 6배가 넘는다. 몇 개월짜리 공공사업 중심으로 26만개의 일자리가 생겨났다고 자랑할 때가 아니라 질 좋은 제조업 일자리가 해외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야 할 때다. 해외 재산 도피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공장의 ‘탈(脫)한국 러시’다. 디아스포라가 위험수위를 넘어선 게 아닌가 걱정된다.

금융보험업은 조세회피처 케이만 군도에 몰려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케이만 군도는 서 카리브해 지역, 쿠바 남쪽에 있는 영국 자치령이다. 인구 6만4000명의 조그만 섬나라다. 하지만 카리브금융센터, 즉 바하마·파나마와 함께 대표적 조세회피처(tax haven)로 수많은 부호와 기업들이 애용하는 지역이다. 1962년 영국령 자메이카부터 독립해 영국 연방의 일원이 됐다.

케이만 군도는 단 한 번도 소득세·법인세·부동산세 혹은 자산소득세 같은 직접세를 부과한 적이 없다. 오직 간접세에 의존함으로써 대표적 조세회피처의 명성을 얻고 있다. 국방과 외교는 영국에 의해 주도되지만, 유네스코(UNESCO)나 카리브 공동시장(CARICOM)에는 준회원 자격으로 참여하고 있다. 최근에는 독립적으로 마약에 관한 국제협약이나 미국과의 상호법무 협조조약을 체결했다.

한국의 케이만 군도 해외직접투자는 2000년 350만 달러에서 지난해 62억 달러로 해마다 꾸준히 증가해 왔다. 특히 2012년 10억 달러를 돌파한 이후 지난해까지 6년 동안 다섯 배 이상 확대됐다. 지난해 기준으로 보면 총 투자액 62억 달러 중에서 32억 달러는 금융보험업이고, 24억 달러는 제조업 투자였다.

그렇다면 제조업이 조세회피처를 이용하는 건가. 그렇지는 않다. 2017년까지 케이만 군도에 대한 제조업 해외투자는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지난해 SK의 도시바 인수에 따라 통신업 투자 23억8000만 달러가 제조업으로 잡혔다. 일회성이었다. 따라서 앞으로도 케이만 군도에 대한 해외직접투자는 제조업보다는 금융보험 업종과 같은 서비스 업종에서 일어날 것으로 예상한다.

신세돈 숙명여대 경제학과 교수